슬롯 꽁 머니 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7

18화_ 독서를 많이 했다고 사람이 변하진 않는다

18

거실은 최대한 가구나 물건 없이 뻥 뚫려야 보기 좋지만, 이상하게도 방으로는 들어가는 게 싫었던 슬롯 꽁 머니였다.


6인용 원목 식탁에 앉아서 책을 보니 목과 어깨가 뭉쳤었다. 게다가 식탁 주변에 책들이 널브러지니 슬롯 꽁 머니의 7살짜리 아들도 세월아 네월아 밥 먹는 중간에 책을 보려고 했다. 슬롯 꽁 머니는 '밥 먹을 땐 밥 먹는 것에 집중하자'라고 교육하기 위해 식탁에서 책과 필기구를 치웠다. 다른 방에 가서 읽자니 아들도 거실에 혼자 있어 무섭다고 반대했다. 그리고 슬롯 꽁 머니도 시야가 트인 거실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TV 없는 거실에 엄마 책상과 아이 책상을 나란히 붙이고 넓은 독서대도 나란히 놓았다. 슬롯 꽁 머니는 책을 읽고 아들은 그림을 그리는 30분 남짓의 시간은 일상의 힐링타임이었다. 독서량에 욕심이 생긴 슬롯 꽁 머니는 밤 독서를 치열하게 했다.

20

회식 후 들어온 슬롯 꽁 머니 남편이 책을 읽고 있는 아내에게 감탄사를 날린다.

슬롯 꽁 머니;이야.. 정말 대단하다~, 우리 지혜! 아직도 안 자고 책 보고 있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어. 아까 12시 때 졸음 한번 왔는데 책 들고 거실 왔다 갔다 걸으면서 고비 넘겼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졸리면 자~!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안 돼. 다음 주에 독서 모임 발제문 만들어야 돼서 어서 책 읽어야 돼.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의 손에 쥐어진 책은 이지성, 스토리베리의 <이독(異讀)이다.

슬롯 꽁 머니는 마음이 바쁘다. 어디에 쫓기는 사람처럼 책을 붙잡고 눈을 부릅뜨고 눈동자를 바쁘게 굴려본다. 그러나 남편과 대화를 하며 동시에 책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슬롯 꽁 머니;지혜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책은 도대체 왜 읽는 거야? 책이 막~ 재미있어~? 공부하는 게 좋은 거야?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책을 왜 읽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가 의자에 엉덩이를 바짝 붙여 앉은 채 고개만 홱 돌린다. 술이 오른 남편의 얼굴을 한심하게 바라본다.

슬롯 꽁 머니;아니... 궁금할 수 있잖아.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궁금하면 자기도 책 읽어봐.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알잖아~ 나한텐 책이 자장가인 거. 먹고살기 바쁜데 책은 무슨 책~슬롯 꽁 머니;

책상 앞에 고집스럽게 앉은 채, 아까부터 계속 같은 페이지다.

슬롯 꽁 머니;내가 자기랑 결혼하고 나서 여러 자격증 미친 듯이 딴 거 알지?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알지~ 우리 지혜 자격증 부자인 거 알지~~ 바로 ‘내 덕분에’ 지혜가 열심히 살고 있다, 내 알지.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저번에 자기가 사고 치고 나서부터 나 책 읽기 시작한 거 알지?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알지, 그건 내가 할 말 없지~~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난 이 생활이 지긋지긋해. 제발 탈출하고 싶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잘살고 싶다고! 제발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가 급발진한다.


남편도 맞대응이다.

슬롯 꽁 머니;우리가 못 살아? 난 행복해. 넓은 새 아파트 살고 있고, 어?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차도 할부로 사려면 살 수도 있어. 우리보다 낮은 데를 봐야지 넌 왜 높은 데만 봐? 황새 쫓아가다간 끝도 없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황새를 쫓아가겠다는 게 아니야. 나도 돈 걱정 없이 직장 생활 안 하고 싶고 읽고 싶은 책 읽고 배우고 싶은 거 배우면서 살고 싶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아니-? 내가 우리 월급 합한 금액 벌어 와도 넌 만족 못 해. 너 일하고 싶어 하잖아.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우리 집 대출을 생각해 봐. 일 안 해도 되는데 하는 것하고 일 안 하면 대출 이자도 못 내는 환경하고 어떻게 같아?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같다는 말 안 했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됐다. 그만해.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책 잘 읽는다고 칭찬했다가 상황이 왜 이렇게 됐지?슬롯 꽁 머니;

억울하다는 듯이 남편이 씻으러 들어간다.


다시 책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남편에게 화를 낸 이유를 자신도 알지 못한다.

오래간만에 슬롯 꽁 머니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냉장고에서 에일 맥주를 하나 꺼내 따르는 입구를 헹군 후 유리컵에 따른다.

책을 읽으면서 마시는 맥주, '책맥'이다. 독서 습관이 잡히고부터는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더욱 책에 빠져들려는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백색소음 삼아 맥주를 홀짝이며 <이독을 마저 읽는다.

슬롯 꽁 머니가 얼마 전에 <일독(日讀)을 먼저 읽었을 때 매일(日) 읽는 습관을 만드는 지침서로 삼았다면 그다음 책인 <이독(異讀)은 다른(異) 관점으로 속도보다 중요한 방향에 대해 나와 있는 책이었다.

지난주에 읽었던 <일독을 다시 펴 봤다. 책의 귀퉁이를 접고 줄 친 곳을 봤다.

'어디선가 이 상황을 본 것 같은데.'


지금까지 해 온 독서가 다 헛것 같았다. 책 몇 권 읽었다고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었더니, 망상도 이런 망상이 없었다 - 이지성, 스토리베리 <일독 P.104 -

지난주에 읽고 눈물이 핑 돌았던 구절이었다. 남편에게 슬롯 꽁 머니가 화를 낸 것은 자신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생각을 입으로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슬롯 꽁 머니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책은 도대체 왜 읽는 거야?'

이 말을'바뀌는 것도 없는데 책은 읽어서 뭐 해?'로 해석한 것이었다.슬롯 꽁 머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읽었지만 책을 읽어서 삶이 바뀐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독서를 단기간에 바짝 해치우고 생활이 나아지길 바랐던 내면의 생각과 마주하고 있었다. 생존과 성공의 수단으로 책을 읽고 나서 일정 기간이 되었을 때 예측이 빗나갔다.

추상적 개념인 '성공'이 눈에 보이지 않자 조바심이 나고 여태 해 왔던 독서가 다 헛것 같았다.

경제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은 남편의 잘못이며, 가족 중에 오로지 혼자만 고생하고 아무도 열심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남 탓', 그것은 슬롯 꽁 머니의 피해의식이었다.


책을 읽고 삶을 바꿀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언하고 다녔었다. 독기를 가지고 전투적인 독서를 했다.

그러나 슬롯 꽁 머니의 잠재의식 깊숙한 곳에서는 책을 통해 변화할 거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가 여러 번의 상처를 입은 슬롯 꽁 머니였다.

'역시 사람은 안 바뀐다,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다.'

그러나'바뀌지 않는 사람'은 슬롯 꽁 머니 자신이기도 했다.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자기방어와 회피의 종착지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 대한 불신이었다.


더 많은 책을 읽으려면 부족한 시간을 쥐어 짜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쌈닭처럼 투쟁하듯 싸우려고만 들었다. 당연히 독서는 피곤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독서와 삶을 공존시키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 이지성, 스토리베리 <이독 P.78 -

슬롯 꽁 머니는 목이 메고 눈물이 왈칵 솟았다. 막힌 목을 뚫기 위해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책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책에 나오는 '현성'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발견했다. 방금까지 피곤한 독서를 하던 슬롯 꽁 머니가 남편에게 쏘아붙인 말들은 바로 쌈닭의 투쟁이었다.

가족과 행복하게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독서를 시작해 놓고선 가족과의 불행을 자초했다.수면시간을 갈아 넣어서 '짜증'이라는 결과물을 만들려고 독서한 꼴이었다.

슬롯 꽁 머니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갔다.


<이독에서는읽기 싫어도 다시 읽으면 되고, 회의가 들어도, 독서로 변화한 것 같지 않아도 다시 하라고 나와 있었다.지독한 실패를 딛고 결국은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들보다 중요하게 다가오는 점이 있었다.

이 책을 쓴 사람도 결국 같은 감정을 거쳤으며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똑같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읽어 나간다면 책으로 삶이 바뀔 수 있다고 잠재의식에 새기기로 했다.


자신이 피해자라는 무력감을 버리고 행복한 삶의 주인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기 위해 감사일기를 쓰기로 했다.

° 남편의 월급이 입금되어 감사합니다.
° 저녁에 밥 안 차리고 외식해서 감사합니다.
° 식세기 덕에 설거지 시간 줄어서 감사합니다.
°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대출 이자를 매달 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직장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 가족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


일기의 내용은 가진 것에 대한 감사에서 점차 존재에 대한 감사로 확대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