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우리를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날씨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생각 또는 철학도 날씨가 만들어낸다. 독일의 검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숨기 좋아했던 하이데거는 오두막에 폭풍이 치고 눈이 오면 그때가 철학자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 서동욱 <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
스무 살 여름이었다. 장마는 한참 전에 끝난 말복 즈음, 친구를 만나러 학교에 가던 길에 예고 없던 비를 만났다. 잠시 비를 피했다 갈지 얼른 뛰어서 약속 장소로 갈지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하느라 학교 정문 앞 횡단보도 한쪽에 서 있던 나는 축축해져 갔다. '거센 비는 아니지만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데 지금이라도 슬롯 꽁 머니을 사러 가?'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멀찍이 있는 편의점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초록불로 바뀌면 뛰어야지 하는데 글쎄, 비가 그쳤다. 내 머리 위에만. 맞다 드라마 속 장면. 고개를 돌려보니 모르는 사람이 살짝 띤 미소와 함께 말했다.
슬롯 꽁 머니;비를 좀 맞은 것 같아서요슬롯 꽁 머니;
어딜 가는지 물었고 학생회관에 간다 하니 같은 방향이라며 함께 가자고 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친구를 만나면 그 모습으론 어딜 가기도 뭐해서 어차피 같은 방향이라니 철판 한 번 깔자 싶은 마음으로 순한 양처럼 그대로 슬롯 꽁 머니 안에 있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수줍은 듯 감사하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 신호등이 허락하여 한참 그 앞에 있었던 듯 느껴졌던 눈앞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정문을 지나고, 거기서 학생회관 옆 중앙도서관까지 쭈욱 뻗은 길을 걸으며 무슨 과인지 몇 학년인지도 물었다. 슬롯 꽁 머니을 씌워준 대가로 순순히 알려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묻는 대로 대답하고는, 그러는 그쪽은 어느 과의 누구인지 묻고 싶었다.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나오지 않아 주저하다 애매한 시간이 흘러 그냥 발걸음을 맞추느라 땅만 보고 걸었다. 그것도 너무 푹 숙이면 슬롯 꽁 머니 주인이 다시 말을 걸까 싶어 적당히 자연스럽게. 정문에서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길이 이리도 길었던가. 어색한, 그러나 고마운 이 슬롯 꽁 머니 속에 얼마나 더 있어야 하나. 그쯤, 미소가 느껴지는 말소리가 들렸다.
슬롯 꽁 머니;다 왔네요슬롯 꽁 머니;
낯섦과 어색함이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느낌인 나는 '드디어!'라는 마음속 말을 듣느라 아주 잠시 현실을 떠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학생회관이 비를 가려주는 곳에 나를 데려다 놓은 슬롯 꽁 머니 주인은 내 손에 슬롯 꽁 머니을 쥐어주고는 벌써 몇 걸음 뛰어가고 있다. 학생회관에 도착한 뒤 갑작스레 거세진 비에 행여목소리가 묻힐까 봐 급하게 따라가며 소리쳤다.
"슬롯 꽁 머니요~!"
다행히 들렸는지 돌아오는 소리가 있다.
슬롯 꽁 머니;집에 갈 때 써요슬롯 꽁 머니;
열심히 따라갔지만 거리가 벌어진다. 더 큰 소리로 물었다.
슬롯 꽁 머니;무슨 과 세요~?슬롯 꽁 머니;
적색편이? 도플러 효과? 희미하게 들렸다.
슬롯 꽁 머니;건.축..공...학....과..... 요슬롯 꽁 머니;
학년도 이름도 못 물어봤다. 어떻게 하지? 계속 따라 가? 나중에라도 슬롯 꽁 머니은 돌려줘야 할 텐데, 아니 돌려주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달리는 일에는 영 젬병인 사람이 생각하느라 판단하느라 더 느려졌었다. 너무 멀어져 버린 슬롯 꽁 머니 주인을 쳐다보고 있다 화들짝,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 시간이 넘었다. 더는 생각을 멈추고 학생회관으로 뛰었다.
개학하면 꼭 찾아가리라 얼마나 다짐을 했던가. 그 다짐이 무색하게 개학을 하고 하루, 이틀, 사흘. 핑계를 대며 미루고 있었다. 동아리 사람들 중 건축공학과 오빠에게 물었지만 그런 외모는 모르겠단다. 귀신이었나. 슬롯 꽁 머니이 남아 있으니 그건 아닐 테고, 하긴 같은 과라고 전 학년의 모든 학생을 알리는 없겠지. 동아리 오빠의 모른다는 그 말을 붙잡고 늘어지며, 건축공학과 사무실에 가서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어차피 또 모른다는 말을 듣겠지. 이상한 사람 취급받으려나?
많은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남는 사람, 혹은 그런 일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결국은 슬롯 꽁 머니을 돌려주지도 감사를 표현하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내버린 빚쟁이는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날처럼 제법 굵은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지다 갑작스레 거세게 내리는 날이면 그 사람이 생각난다. 빚을 청산했다면 기억이야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을까 싶다.
얼마 전, 자주 찾는 유튜버의 '주는 슬롯 꽁 머니 성공한다'는 제목의 영상을 보았었다. '기버(Giver)'의 삶이 어떻게 성공으로 이어지는가를 다루는 내용이었고 듣던 중 귀에 꽂히는 말이 있었다.
'내가 베푼 선의는 그대로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이에게 다시 선행을 베풀게 하고 그런 과정을 반복하여 결국은 자신에게 어떤 형태로든 돌아온다'
아차 하며 이제까지의 나를 돌아봤다. 슬롯 꽁 머니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그 고마움을 대신 다른 선행으로 갚고 결국은 그 사람이 내가 받았던 그 친절을 어디선가 돌려받기를 기도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갚을 방법을 알게 된 셈. 살아가는 동안 작더라도 조건 없는 선행이 숙제다. 그날의 나를 뽀송하게 지켜주었던 건축공학과 그 사람은 20대의 나이에 벌써 기버(Giver)의 삶을 살고 있던 것이었나? 그럼 지금쯤 성공을 했을까? 몇 번은 더 찾아볼 걸 그랬다. おけんきです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