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는 양귀자 작가의 장편 소설 <슬롯 꽁 머니을 꺼냈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표지가 예쁘거나 두께가 아담해서 마음에 쏙 들어온 것이 아니라 그저 제목이 '슬롯 꽁 머니'이라서 좋았다. 다가오는 새해를 위한 첫 책으로 <슬롯 꽁 머니을 읽는다면 그 안에 어떤 글자들이 씨줄과 날줄로 엉켜있든 제목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게다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때 가장 예쁜 마음은 슬롯 꽁 머니을 충전해 둔 상태가 아닐까. 아무튼 손의 끌림으로 읽게 된 책인데, 식탁 위나 가방 안에 놓인 <슬롯 꽁 머니을 볼 때면 그저 슬롯 꽁 머니을 얻게 된다.
한 해의 끄트머리가 되면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이번 겨울에는 첫째 달에서 둘째 달로 달력을 넘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일상의 틈 사이로 크고 작은 고민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래도 한 해 동안 성장한 덕일까.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작은 일은 상황에 따라 뒤로 미룰 줄도 알았고, 여유로운 마음도 가질 수 있었다. 걱정에 걱정을 하며 잠 못 이루는 날이 몇 날은 되어야 정상인데, 실제로는 잘 자고, 잘 먹으며 기분을 잘 유지했다. 그것도 밝게, 슬롯 꽁 머니을 가지고.
일이 생기면 해결해야 하는 것은 현실이지만, 새로운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만으로도 슬롯 꽁 머니을 품는 나는 비현실적인 삶, 공상에 빠진 것일까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슬롯 꽁 머니만으로는 절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자꾸만 슬롯 꽁 머니은 나를 찾아온다. 슬롯 꽁 머니은 '나를 잊지 말라'는 듯 불현듯 떠올라 다시 잘 될 거라는 기대를 심어준다. 그 슬롯 꽁 머니이 싹을 틔우면 나는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꿈도 꾸게 된다.
슬롯 꽁 머니이 내 인생에서 특별한 단어로 가슴에 파고든 날은 아마도 7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그 무렵에 우연히 성당의 평일 미사 전례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읽을 독서(성경 말씀)가 바로 슬롯 꽁 머니에 관한 것이었다.
보이는 것을 슬롯 꽁 머니하는 것은 슬롯 꽁 머니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슬롯 꽁 머니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슬롯 꽁 머니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 24-25)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을 하거나 포기를 했던 나는 독서를 준비하며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이전에 나는 슬롯 꽁 머니하는 일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루어지길 빌었고, 이왕이면 최대한 빨리 때가 오길 기대했다. 그런데 진짜 슬롯 꽁 머니이 무엇인지 우연히, 그것도 인생 첫 전례 봉사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슬롯 꽁 머니을 버리지 않게 된다. 지나간 과거를 슬롯 꽁 머니할 수 없듯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래를 슬롯 꽁 머니하며 사는 것이다. 또, 광활했던 슬롯 꽁 머니의 범위도 조금씩 정리가 되었다. 나에게 슬롯 꽁 머니은 대박과 뜻밖의 횡재가 아니라 일상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충분한 것이 되었다. 특히 어제가 아니라 오늘, 지금, 바로 이 순간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게 슬롯 꽁 머니으로 느껴졌다. 하나 더 달라진 점은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슬롯 꽁 머니의 선물로 여기는 마음이다. 앞으로도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롯 꽁 머니을 품고 사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양귀자 <슬롯 꽁 머니
<슬롯 꽁 머니 속에는 지난여름에 끼워둔 계수나무의 잎이 들어있었다. 어디에 뒀는지 몰라서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에 있었구나. 계수나무의 잎은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들고 솜사탕 향을 풍긴다. 하지만 <슬롯 꽁 머니 속에 있던 잎은 여전히 초록 여름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