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드는 생각은 기록의 중요성이다. 이러이러한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거나 뿌듯해하기 위해 하는 기록이 아니라 개인의 기억력이 그 책을 만났을 당시의 기분이나 다 읽었을 때의 기쁨 등을 간직하지 못하므로 나중에 되새기기 위해 기록이 필요하다(내년부터는 아내처럼 해시태그로 분류를 해야겠다). 책 제목을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이보다 훨씬 많은 책들을(특히 시집은 거의 다 빠져 슬롯 머신 프로그램) 구입하거나 읽었으면서 '귀찮아서' 또는 '나중에 제대로 써야지' 하는 생각에, '펜이 없어서' 등등의 이유로 누락했음을 상기했다. 그 와중에도 기록으로 남긴 책들에 대한 기억을 되돌아보는 것은 즐거웠다.
글은 퇴고를 하는 순간부터 진짜 글이 되는 것처럼 독서는 다시 기억하고 소환함으로써 비로소 내 정신의 살과 뼈가 된다. 영화나 연극도 만찬가지다. 작년에는 첫 책의 북토크나 강연, 그리고 그로 촉발된 글쓰기 강연 등으로 바빴고 신경을 많이 빼앗긴 해였다. 두 번째 책도 나왔다. 세 번째 네 번째 책은 이미 요청을 받았고 기획 단계인데 정작 시작을 못하고 있다. 마음을 다잡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쓰려는 열망과 혼자만의 시간, 그리고 손만 있으면 쓸 수 있다. 머리나 공간보다 필요한 건 이것들이란 걸 경험을 통해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또 하나 깨달은 건 '읽어야 쓸 수 있다'는 슬롯 머신 프로그램이다. 읽으면서 써야 한다. 엄청난 내공과 독서력을 가진 몇몇 천상의 작가들을 제외한다면 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진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