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황후 또는 모드 황후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잉글랜드의 슬롯는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1세와 그의 아내인 스코틀랜드의 슬롯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슬롯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슬롯의 어머니의 대모가 할머니인 플랑드르의 슬롯였기에 결국 할머니의 이름을 딴것이기도 했습니다. 슬롯의 어머니인 스코틀랜드의 슬롯는 매우 종교적인 인물이었는데 슬롯 황후의 외할머니인 웨식스의 마거릿은 성인으로 시성된 인물이었으며 스코틀랜드의 슬롯는 어려서부터 이모가 수녀원장으로 있는 수녀원에서 교육받았기에 매우 교육을 잘 받았을뿐만 아니라 신앙심도 매우 깊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슬롯(모드), 슬롯 황후
슬롯의 부모는 사실 정략결혼한 사이였습니다. 헨리 1세는 이전 잉글랜드 왕가인 웨식스 가문의 혈통을 가진 스코틀랜드의 슬롯를 아내로 맞는 것이 정복왕 윌리엄 이전부터 잉글랜드에 자리잡고 있던 세력을 달래는데 좋았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슬롯 역시 잉글랜드의 국왕과 결혼하는 것이 그녀는 물론 그녀의 형제 자매들에게 모두 도움이 되었기에 그와의 결혼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슬롯의 아버지와 오빠가 전투에서 전사한뒤 스코틀랜드 내에서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슬롯의 어머니마저 남편이 죽은 직후 사망했기에 어렸던 남은 슬롯의 형제 자매들은 정치 투쟁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슬롯의 숙부와 슬롯의 이복오빠가 왕위를 두고 다툼을 벌였는데 당시 스코틀랜드는 형제 상속과 부자상속이 혼재해있던 상황이었고, 슬롯의 아버지인 말콤 3세는 후계자로 함께 사망한 슬롯의 오빠를 지명했었기에 상황은 더 복잡했던 것입니다. 결국 슬롯의 형제 자매들은 잉글랜드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으며 슬롯가 잉글랜드의 국왕과 결혼하면서 슬롯의 형제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왕위를 되찾을 기회를 얻을수 있었으며, 슬롯의 자매가 권력을 가진 남성과 결혼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헨리 1세와 아내인 스코틀랜드의 슬롯
슬롯의 어린시절은 당대 많은 중세 여성들처럼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슬롯의 어머니는 매우 신앙심이 깊었고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이었으며, 또한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여성이었기에 아마도 슬롯 역시 이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슬롯는 어린시절 수많은 친척들과 함께 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슬롯에게는 친동생으로는 남동생이었던 윌리엄 아델린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슬롯의 아버지는 수많은 정부가 있었으며 수많은 사생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슬롯의 어머니는 자비로운 인물이었으며 남편의 사생아들을 보호하고 교육시켰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마 슬롯의 이복오빠인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는 이후 이복 여동생에게 매우 충성스러웠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모의 자녀들이었던 블루아 백작의 자녀들이나 아직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지 못한 외삼촌 그리고 국왕의 후견아래 있던 강력한 귀족의 자녀들 역시 슬롯와 어린시절 알고 지내면서 함께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슬롯는 당대 대부분의 유럽 왕가 여성들처럼 어린시절 정략결혼이 결정됩니다. 그 상대는 바로 당시 로만왕이었던 하인리히 5세였습니다. 하인리히 5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황제의 후계자인 로만왕이었으며 아버지와의 대립관계에서 승리를 거두고 결국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내기까지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인리히 5세는 아마도 강력한 외부세력을 끌어들이길 원했었으며 그 상대가 바로 강력한 노르만인들의 수장이자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헨리 1세였던 것입니다. 헨리 1세 역시 이 혼담에 매우 긍정적이었는데 그는 사실 정복왕 윌리엄의 막내아들로 형들의 불화와 때이른 죽음으로 잉글랜드 국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르망디 공작령을 두고 가족내 갈등이 있었는데 특히 큰형이었던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와의 갈등은 헨리 1세에게 위협적이었으며 또한 큰형이 있는데도 막내인 그가 모든 것을 상속받은 것은 명분이 약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있는 인물인 황제가 자신의 딸과 결혼을 원하는 것은 헨리 1세에게 매우 좋은 기회였으며 당연히 딸을 하인리히 5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지 하인리히 4세를 가둔 하인리히 5세
1109년 슬롯의 결혼협상이 끝났으며, 1110년 결혼하기 위해서 잉글랜드를 떠나게 됩니다. 독일로 간 슬롯는 남편이 될 하인리히 5세를 만났으며 그와 약혼한뒤 로만왕의 아내인 왕비로 대관합니다. 슬롯가 하인리히 5세와 만난뒤 약혼만 한 가장 큰 이유는 이때 슬롯의 나이가 겨우 8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정한 최소 결혼 연령은 12살이었으며 이전의 결혼은 무효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정식 결혼식을 올릴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대 나이가 어린 신부가 남편의 집으로 가서 결혼할때까지 자라는 것은 흔한 것으로 어려서 남편의 집안에서 자라면서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 그리고 그 가신들과 친숙해지는 것은 이익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은 1114년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후 슬롯는 이제 황제의 아내인 황후가 되었습니다. 비록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하인리히 5세와 슬롯의 황제와 황후로 대관한 것에 대해서 애매한 상황이긴 했지만 슬롯는 이후 슬롯 황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슬롯는 황후로 황제의 궁정에서 살았기에 어려서부터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 됩니다. 특히 남편인 황제 하인리히 5세는 전쟁등의 이유 때문에 자주 궁정을 비웠고 슬롯는 황후로 남편을 대신해서 궁정을 주재하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슬롯는 남편과 함께 여러 전투에 동행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은 슬롯가 후에 잉글랜드 왕위를 얻으려할 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슬롯와 하인리히 5세의 결혼 연회
슬롯는 오래도록 안정적 삶을 살았지만, 1120년부터 슬롯의 삶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슬롯의 남동생이자 헨리 1세의 후계자였던 윌리엄 아델린은 무력을 통해서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프랑스 국왕에게서 인정받았습니다. 프랑스에 왔던 헨리 1세와 윌리엄 아델린 그리고 다른 가족과 가신들은 잉글랜드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 국왕과 후계자가 같이 배를 타면 둘다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각기 다른 배를 타고 갑니다. 그리고 우려했던 사고가 일어납니다. 1120년 11월 25일 윌리엄 아델린이 탔던 화이트 쉽이 난파됩니다. 사실 윌리엄 아델린은 배가 난파당했을 때 처음에는 구명보트에 올라서 목숨을 건졌었습니다. 하지만 이복누나였던 폐르셰 백작부인 슬롯 피츠로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물에 뛰어들었고 결국 사망했습니다.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 아들이었던 윌리엄 아델린의 죽음은 곧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의 계승에 큰 변동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1세는 서둘러 재혼해서 아들을 얻으려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누나인 아델라의 아들인 블루아의 에티엔(스티븐)을 후계자 후보로 고민했으며 그에게 잉글랜드에 발판을 마련할수 있도록 했습니다. 히지만 슬롯와 슬롯의 남편인 하인리히 5세 역시 왕위계승에 관심을 보입니다. 슬롯는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자 딸이었으며 당연히 상속권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헨리 1세는 이에 대해서 생각을 했을 듯합니다만, 멀리 떨어진 제국의 황후였으며 또한 자녀가 없던 딸과 사위에게 왕위계승을 하는 것을 아주 심각하게 고려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화이트쉽 난파
1125년 상황은 또 한번 바뀌게 됩니다. 슬롯의 남편인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슬롯에게는 자녀가 없었으며 남편이 죽자 슬롯의 존재가 제국의 궁정에서 애매해진 것이었습니다. 슬롯는 황후였지만 다음 황제의 모후가 아니었기에 정치적으로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슬롯가 제국에서 머문다면 정치적 이유로 속세를 떠나 수녀원으로 들어가야할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재혼할수도 있었지만 슬롯의 정치적 상징성 때문에 제국 내에서 슬롯가 재혼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슬롯는 차라리 노르망디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05
슬롯의 씰
앙주 백작 가문은 노르망디를 두고 노르망디 공작 가문과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납고 정치적으로 기민했던 앙주 백작들은 헨리 1세가 노르망디를 두고 형과 조카와 갈등을 지속할 때 편을 바꾸면서 이익을 추구했었습니다. 헨리 1세는 아들인 윌리엄 아델린을 조프루아의 자매인 앙주의 슬롯와 결혼시켰던 것 역시 이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윌리엄 아델린이 죽은뒤 앙주의 슬롯의 혼수는 두 가문의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조프루아의 아버지는 화가나서 다른 딸인 시빌라를 헨리 1세의 조카이자 노르망디 공작령을 두고 다툼을 하던 윌리엄 클리토와 결혼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헨리 1세의 후계자가 될 슬롯와 앙주 백작의 아들인 조프루아가 결혼한다면 두 가문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슬롯는 사실 앙주의 조프루아에 대해서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보다 10살 넘게 어렸을뿐만 아니라 겨우 “백작”의 아들과 결혼한다는 것은 황후인 자신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정치적 문제는 정치적 문제였으며 슬롯는 조프루아와 결혼을 합니다. 당연히 처음에 부부는 서로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슬롯는 당연히 처음부터 조프루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조프루아 역시 자신을 무시하는 아내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헨리 1세는 후계자인 딸 슬롯와 결혼한 조프루아에게 권리를 부여해야했지만 이를 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조프루아는 아내와 장인이 자신을 홀대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부부간의 불화로 이어졌으며 슬롯는 결혼 직후 노르망디로 돌아와버립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연히 헨리 1세는 딸과 사위에게 압력을 가하게 됩니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슬롯는 아마 아버지가 자신에게 상속하려하는 것은 자신을 징검다리로 자신의 아들을 더 확고한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슬롯는 다시 남편과 함게 하기로 했으며, 헨리 1세는 딸이 남편에게 돌아가자 모든 신하들에게 딸을 후계자로 충성을 맹세하게 했었습니다.
앙주의 조프루아
1133년 슬롯는 첫 아들인 앙리를 낳습니다. 슬롯가 아들을 낳자 당연히 헨리 1세는 원하던 후계자를 얻은 것으로 여겼으며 기뻐해서 직접 외손자를 만나러 올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 슬롯는 둘째아들인 조프루아를 낳았으며 두 아들을 얻은 슬롯를 보고 헨리 1세는 이제 슬롯를 확고한 후계자로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치 상황은 부녀간의 관계를 경색되게 하는데, 슬롯와 조프루아는 헨리 1세에게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합니다만, 헨리 1세는 이것이 자신의 권한을 도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딸에게 화를 냅니다. 그리고 이것은 노르망디에서 반란을 부추겼을뿐만 아니라 슬롯의 남편인 조프루아는 앙주 가문의 사람들처럼 이런 반란을 지원하기까지 했습니다. 헨리 1세는 이 반란을 진압했었습니다만 얼마뒤 질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그리고 헨리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슬롯가 잉글랜드의 첫 여왕이 되는 것을 막게 됩니다.
헨리 1세가 죽을 무렵 슬롯 부부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헨리 1세가 죽자마자 헨리 1세의 조카인 블루아의 에티엔은 서둘러 잉글랜드로 갔으며 헨리 1세가 슬롯를 후계자로 맹세 시켰던 것을 철회했다고 주장했으며 잉글랜드 국왕 스티븐으로 즉위해버립니다. 이때 헨리 1세의 측근들 대부분은 프랑스에 있었기에 스티븐의 말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해줄수가 없었습니다. 슬롯 부부는 노르망디를 점령하려했지만 이당시 상황은 애매했습니다. 노르망디의 귀족들은 누구를 지지해야할지 애매했는데 특히 잉글랜드에서 스티븐이 즉위해버리면서 노르망디-잉글랜드 연합에 타격이 갈 것을 우려해서 더욱더 그랬습니다.
스티븐, 슬롯의 사촌, 잉글랜드의 국왕
사실 슬롯는 잉글랜드로 가서 자신의 계승을 바로 주장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슬롯는 그러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슬롯가 셋째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버지가 죽은 8개월후 슬롯는 막내 아들인 기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은 후 슬롯는 이제 자신의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슬롯는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외교적 관계 때문에 슬롯는 많은 이들, 특히 교황이 정당한 후계자인 자신이 아닌 찬탈자인 스티븐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아마 슬롯가 무력으로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로 결정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1138년 슬롯의 이복 오빠였던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스티븐에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글로스터 백작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중 하나였는데 스티븐과의 갈등을 피할수 없었으며 결국 그는 이복 여동생이자 스티븐보다 더 강력한 명분을 가지고 있던 슬롯 황후를 지지하게 됩니다. 이런 지지는 슬롯의 남편인 앙주 백작이 적극적으로 노르망디를 장악하는 전쟁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결국 슬롯는 1139년 글로스터 백작과 함께 잉글랜드로 군대를 이끌로 가게 됩니다. 슬롯는 글로스터 백작과 다른 인물들의 지지를 받아서 잉글랜드로 가게 됩니다. 처음 슬롯는 잉글랜드에 상륙한 직후 계모였던 아델리자의 집인 아룬델 성으로 갔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스티븐은 아룬델 성을 포위했고 슬롯와 가족들을 사로잡았습니다만, 스티븐은 슬롯와 슬롯의 기사들을 풀어주게 됩니다. 아마 스티븐은 여성인 슬롯가 아니라 슬롯의 이복오빠인 글로스터 백작이 더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와 그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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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년 슬롯는 엄청나게 운이 좋게 됩니다. 체스터 백작 라눌프가 마음을 바꿔서 슬롯를 지지했으며, 이에 스티븐은 라눌프가 있던 링컨 성을 공격합니다. 이 링컨 전투에서 스티븐은 슬롯의 포로가 됩니다. 국왕을 사로잡은 슬롯는 이전의 “정복왕”전통에 따라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를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슬롯의 왕위계승은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슬롯는 “잉글랜드의 여영주Lady of England”지위를 얻게 되지만, 슬롯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슬롯는 즉위를 위해서 런던으로 갔지만 슬롯의 인기는 더욱더 떨어졌으며 결국 슬롯는 즉위식도 하지 못하고 런던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슬롯는 이때 오만하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아마도 슬롯가 다른 정치적 중재를 다 거부하고 국왕으로 즉위하려고 밀어붙였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입니다. 당대 여성이 정치에 관여하던 방식이 “중재”였으며 중재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여성 정치가의 덕목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슬롯는 이런 중재를 거부했고, 슬롯가 자신의 명분과 권리를 통해서 왕위에 오를려고 한 것조차도 다른 이들이 그녀를 “오만하다”고 평가하는 원인이었으며 결국 런던에서 쫓겨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슬롯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슬롯의 남편인 앙주 백작은 노르망디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이것은 스티븐의 세력을 더욱더 악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이렇게 되자 스티븐 쪽에서도 무슨 방법을 고안해야했으며 결국 1142년 옥스퍼드 포위 공격이 일어납니다. 옥스퍼드 성에서 슬롯와 슬롯의 기사들은 포위공격으로 갇혀있었습니다. 포위 공격을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자 결국 슬롯는 성을 탈출하기로 결정합니다. 슬롯가 포로가 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슬롯는 두명의 기사만 데리고 탈출했는데 여성이었던 슬롯가 대담하게 탈출을 감행한것에 대해서 당대나 후대의 많은 이들이 슬롯가 어떻게 탈출했는가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슬롯가 눈으로 뒤덮힌 지역으로 도망가기 위해서 흰 망토를 두르고 도망쳤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알수 없지만 슬롯는 도망쳤고 다음날 옥스퍼드 성은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치러진 전투에서 슬롯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포로로 사로잡혔기에 슬롯의 대담한 탈출이 빛을 잃게 됩니다. 스티븐과 로버트가 모두 포로가 된 상황에서 결국 슬롯는 로버트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포로인 스티븐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내전 상황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1140년대 후반이 되면 지날수록 슬롯의 지지세력은 점차 더 약해지는데 슬롯의 가장 큰 지지자였던 글로스터 백작이 1147년 사망했고, 다른 지지자들은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러 떠나게 됩니다.
내전동안 슬롯의 세력권(파란색)과 스티븐의 세력권(빨간색), 회색은 웨일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슬롯는 아마 이제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앙리(헨리)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1148년 슬롯는 잉글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아들에게 넘기고는 잉글랜드를 떠나 노르망디로 돌아갑니다. 슬롯는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정확히는 남편과는 함께 살지 않습니다. 아마 부부는 서로 맞지 않는 사이였으며 정치적 목적으로 부부가 되었기에 둘다의 정치적 목적이 어느정도 이루어진 상황에서 같이 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부부로 서로에 대해서 존중하는 입장이었지만 아마도 이것은 둘다 정치적으로 서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듯합니다. 이후 슬롯는 노르망디에 머물면서 노르망디 지역의 행정에 더 집중했다고 합니다.
슬롯가 노르망디에 있는 동안 잉글랜드 내에서 상황 역시 바뀌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많은 영주들은 여전히 노르망디와의 연결고리가 있었으며 그렇기에 스티븐이 잉글랜드를 통치하고 슬롯와 슬롯의 아들인 앙리가 노르망디를 통치하는 상황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스티븐은 여전히 슬롯가 없었음에도 슬롯의 세력을 완전히 억누르지도 못했었습니다. 결국 영주들은 중재안을 제시하는데 스티븐의 후계자를 슬롯의 아들인 앙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스티븐은 이 제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1153년 장남이 사망하면서 아마 실의에 빠지면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1154년 스티븐이 죽은뒤 앙리는 잉글랜드로 왔으며, 잉글랜드에서는 그를 국왕 헨리 2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궁정을 주재하는 헨리 2세와 아내인 엘레오노르 다키텐
슬롯는 아들에게 권리를 물려준 뒤 노르망디에 있으며서 주로 노르망디만 관여했을뿐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아들에게 매우 좋은 조언자로 아들에게 여러 정치적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했으며, 헨리 2세 역시 어머니인 슬롯를 매우 신뢰했다고도 합니다. 아마 슬롯는 수많은 정치적 경험이 있었으며 또한 잉글랜드에서 겪은 경험 역시 슬롯가 더욱더 정치적으로 신중한 사람이 되게 했을 듯합니다. 또한 슬롯는 황후인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서 아들의 외교 문제에 도움을 주기도 했었습니다.
슬롯는 1167년 9월 10일 노르망디 공작령의 수도인 루앙에서 사망했습니다. 슬롯의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태어나면서 고귀했으며, 결혼으로 더욱더 고귀해졌고, 후손을 통해서 가장 고귀해졌다. : 헨리의 딸 아내 어머니인 슬롯 여기에 잠들다.”
슬롯 황후
잉글랜드를 두고 슬롯 황후와 스티븐의 경쟁은 잉글랜드 상속에 대해서 중요한 기점이 됩니다. 스티븐 역시 어머니가 정복왕 윌리엄의 딸이었기에 왕위를 주장할수 있었습니다. 비록 여성인 슬롯 황후는 여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결국 슬롯의 권리를 통해서 아들인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얻었기에 잉글랜드에서 여성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처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여성의 계승권리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으며 이것은 훗날 잉글랜드 왕위계승문제에서 더욱더 부각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