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머신, 널 붙잡을 수 있다면

어느 새벽, 슬롯 머신을 도둑맞았다는 표현을 읽고 자연스럽게 <만추 리마스터링 영화를 플레이했다. 탕웨이의 우수에 찬 눈빛과 현빈의 꾸밈없는 웃음이

대조를 이루면서 영화는 둘이 만나고 헤어진 72슬롯 머신을 덤덤히 보여준다.

​살인을 저지르고 7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애나. 그녀의 얼굴은 표정이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인지 답을 찾기 위해서일까. 7년 만에 돌아온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해서일까. 그녀만의 슬롯 머신에 갇힌 채 3일 후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새 옷을 사 입었다가도 그냥 화장실에 버리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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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로 가는 버스에서 애나에게 우연히 돈을 빌리게 되면서부터 훈과 애나의 인연이 시작된다. 자신의 젊음을 무기로 누나들에게 사랑(?)을 주고 용돈을 받아 하루하루 사는 훈은 그를 거절하는 애나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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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각자의 슬롯 머신 속에서 살아온 남남이 같은 슬롯 머신을 공유하게 된다. 훈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주며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고, 돈을 갚으면 그때 돌려달라는 말을 한 채 헤어진다. 훈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는 쓰레기통에 버리지만 시계는 간직하는 애나.

그 후로도 우연은 반복되며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함께 식사도 하고, 시애틀을 관광하기도 하며 조금씩 웃음을 보이는 그녀. 그리고 덤덤히 자신의 과거를 중국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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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자주 왔었어요 누군가와.

-그는 오빠의 친구였어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죠.

-그땐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좋아했어요.

-어느 날 그는 떠났고

-난 다른 남자와 결혼했어요. 처음엔 저만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남자였어요.

-그런데 슬롯 머신이 지나고 보니 그는 나약하고 의심이 많은

남자였어요. 힘든 슬롯 머신들이었죠.

-어느 날 옛날 그 사람이 돌아와 함께 떠나자고 했어요.

-근데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우릴 죽이려 했어요.

-그날 나는 맞아서 정신을 잃었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예?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에 훈은 화이(안 좋네)와 하오(좋아)를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말에 공감해 준다. 언어뿐만 아니라 행동과 눈빛으로도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애나는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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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늘 똑같은 슬롯 머신이 흐른 그녀에게 어머니가 죽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옛 연인과 재회를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한다. 크로노스의 슬롯 머신에서 카이로스의 슬롯 머신으로 넘어오며 진정한 자신의 슬롯 머신을 찾게 된다.

그리스어에는 '때'를 나타내는 말이 카이로스와 크로노스가 있다. '크로노스 슬롯 머신'으로서, 과거부터 미래로 일정 속도·일정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한 슬롯 머신을 표현해, '카이로스 슬롯 머신'으로서, 일순간이나 인간의 주관적인 슬롯 머신을 나타내기도 한다.

애나는 그저 주어진 슬롯 머신을 감옥에서 흐르는 대로 보낸다. 언제 바깥세상으로 나올지 모르는 암담함 속에 자신을 가둬버린 채 표정 하나 없이 크로노스의 슬롯 머신을 보낸다. 우리 주변에도 그냥 슬롯 머신이 흘러가는 대로 자신을 맡긴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눈뜨면 출근 준비하고 회사에 나가서는 퇴근 슬롯 머신만 기다린다. 막상 퇴근을 한 후에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지 생각하지도 않고 쇼츠나 릴스를 틀어놓고 몸을 맡긴다. 감옥에서의 애나와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세상이라는 감옥에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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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3일간의 슬롯 머신이 애나를 주도적인 사람으로 바꾸어놓았다. 그저 어머니 장례식에만 참석하고 돌아오겠다는 초점 없는 눈동자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이든, 슬픔이든, 노여움이든 살아 움직이게 된다. 훈으로부터 낡은 시계를 선물받고 비로소 그녀는 그녀의 슬롯 머신을 자각한 듯 보인다. 함께 있을 슬롯 머신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 슬롯 머신을 붙잡고 싶다는 안타까움을 격정적 키스로 달래본다. 하지만 이별은 찾아왔고, 그렇게 또 슬롯 머신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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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를 하고 훈과 만나기로 한 휴게소 커피숍에서 미소 짓고 있는 애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물리적인 크로노스의 슬롯 머신에 살았던 그녀는 비로소 찰나의 순간을 붙잡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설령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녀 앞에 주어진 새로운 슬롯 머신을 카이로스의 슬롯 머신으로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