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첫째현이는내가 둘째를 임신하면서 바카라에 가게 되었다. 고작 두 돌 남짓한 아기 때였다.
아파트 단지나 근처에는 바카라이 없어 차로 20분가량 걸리는 숲속 바카라에 보냈다. 처음 한 달간은 울며불며 힘들어했으나 그러나 저러나 매일 가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점차 수긍하며 그곳에 적응해 나갔다.
첫째는 5년 전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만 3년간 그 숲속 바카라에 다녔다.
그러나 주변에 같은 바카라을 다니는 아이가 없었고, 같은 반 엄마들과의 교류도 전혀 없었기에 바카라 친구를 초대하는 일은 없었다.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첫째가 자주 이야기하는 친구의 이름이 비아이고, 바카라 선생님이 올려주신 사진에서 본 그 친구가 참 귀엽게 생겼다는 정도였다.
그 당시민간바카라에선 친구의 생일 때가 오면 2,000~3,000원 정도의 선물을 포장해서 보내는 것이 관례였는데, 나는 첫째가 특히 자주 이야기했던 친구에게 좀 특별한 선물을 해주기 위해 처음으로 바카라 측에 친구 엄마의 연락처를 정중히 물어본 후 따로 연락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해주고 싶던 선물은 바카라의 사진이 들어간 티셔츠였다. 둘째의 백일 기념으로 무지 바디슈트에 이름을 인쇄해서 조리원 동기 아이들과 사진 촬영을 했는데 반응이 꽤 괜찮았다. 그 바카라에게도 사진 티셔츠를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무지 티, 전사지, 가정용 프린터기가 필요하다. 아이 사진이 인쇄된 전사지를 무지 티셔츠 위에 놓고 다림질을 한 후 떼어내면 세상의 하나뿐인 티셔츠가 된다.
친구 생일을 계기로 내 휴대전화에 바카라 친구의 엄마 번호가 처음으로 저장되었다.
"010-xxx-xxxx
이비아 어머님"
직장에 다니던 비아 엄마와 접점은 딱히 없었으나 이내 연락을 주고받을 계기가 생겼다.
바카라님은 마스크와 각종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팀장이었고, 내가 디자인 일을 하는 것을 아시고 마스크 패키지의 디자인과 웹 상세페이지의 일을 의뢰하기 위해 연락을 준 것이었다.
당시 나는 장롱 면허였고, 버스 배차 간격도 넓었던 외곽에 살았기에 활동 반경이 늘 거기서 거기였는데, 그날은 심지어 버스 시간도 맞지 않아 강제 산책을 하며 약속 장소였던 동네에서 가장 큰 카페까지 걸어갔다. 힘들게 도착한 나와 달리 운전해서 카페 앞에 주차를 하고 등장하는 비아 어머님이 순간 너무 멋진 커리어우먼 같았다. 나보다 한 살 위인 바카라님은 정중하고 예의를 갖춰서 디자인 의뢰를 주셨다.
그렇게 일로 다시 만난 우리 사이는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마스크 패키지 디자인에 들어갈 캐릭터와, 상세 페이지 등을 작업하며 바카라니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고, 이 일은 비아 어머니가 일본으로 가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형아지만 아직 바카라아이였던 첫째와 고작 두세 살밖에 안된 둘째를 육아하며 틈틈이 작업한 나의 작업물들이 늘어갔다.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았던 나의 패키지 디자인들이 하나씩 실체가 되어 실물을 마주할 때의 보람과 뿌듯함으로 힘든 육아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바카라 나에게 있어선 귀인이 아니었나 싶다. 전국적으로 마스크를 구하기 어려웠던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때, 바카라 가끔 서프라이즈로 보내주었던 박스에는 내가 디자인했던 마스크가 한 보따리씩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