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슬롯 머신 규칙. 이름은 참 많이 들었다. 대학교 때 친한 친구가 늘 그의 책을 들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나처럼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더러 있겠지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찾기 힘들 거 같기도. 무라카미 슬롯 머신 규칙의 잡문집. 50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벽돌책을 독서 모임 덕에 읽어볼 엄두를 내었다. 혼자 읽었다면 서문을 읽다가 덮었을지도. 번역된 문체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고 가벼운 듯 깊은 내용은 금방 이해하기 힘들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매일 정해진 분량을 꼭꼭 씹으며 읽어 내려갔다. 간혹 가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잘 주워서 톡방에서 공유하기도 했고, 다른 작가님들의 사유를 보며 내가 놓친 부분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함께 읽으니 두 번 세 번 읽은 거 같은 느낌. 책의 후반에서야 슬롯 머신 규칙의 문체가 눈에 들어왔고 그의 유머에 자신 있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슬롯 머신 규칙와 함께 한 아침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소설가 무라카미 슬롯 머신 규칙는 29살까지는 소설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에 빠져 있긴 했지만 본인에게 소설을 쓰는 재능은 없다고 믿었다. 슬롯 머신 규칙는 음악, 특히 재즈를 무척이나 사랑했던지라 도쿄에서 작은 재즈바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씨는 더없이 화창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야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좋아하는 팀의 경기를 보고 있었다. "탁"하는 경쾌한 안타 소리와 함께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라는 강렬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무라카미 슬롯 머신 규칙의 소설은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 슬롯 머신 규칙 쓰고 싶다고 생각을 한 것은 초등학교 때다. 어느 날 먼지가 수북이 쌓인 아빠의 낡은 타자기를 발견했다. 늘 거기 있었을 텐데 그날 내 눈에 들어 온건 우연이었을까. 하늘색이었는지 회색이었는지 색깔마저 희미한 정말 오래된 타자기. 탁-. 탁-. 탁-. 살짝 여운이 따라오는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는 공이 배트에 탁 맞는 안타소리만큼이나 꽤나 선명하다. 빨간 머리 앤의 엉뚱한 상상력을 사랑했고 작은 아씨들에서 둘째 조의 글 쓰는 모습이 멋있었고, 3000원만 생기면 서점으로 달려가 시집을 샀던 어린 시절의 나. 무심코 눌러본 타자기 소리에 '나도 한번 써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하지만 타자기까진 욕심내지 못하고 나의 첫 단편을 원고지에 연필로 쓱쓱 적어 내려갔다.
종이 인형 놀이를 하며 만들어 냈을 법한 이야기. 지금 더듬어보면 신파스럽고 유치한 내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쓸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셨을까. 그 후 아빠의 타자기를 허락받았다. 탁-탁-탁- 좋아하는 소리를 들으며 스토리를 써내려 가니 마치 내가 진짜 작가가 된 거 같아 마음이 충만했다. 지금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며 슬롯 머신 규칙 쓰는 이 느낌과 어쩐지 오버랩된다. 책을 읽으며 마음껏 상상하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책을 쓰는 작가를 동경했던 나는 오래가지 않아 현실을 직면했다. 글 쓰는 재능이 나에겐 없다는 걸 깨닫고 난 뒤, 더 이상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타자기에 다시 먼지가 쌓였다.
스물아홉 살이 되고 난데없이 슬롯 머신 규칙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뭔가 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나 발자크에 필적할 가망은 없었지만, 뭐 그래도 상관없잖아, 하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딱히 대문호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슬롯 머신 규칙 쓴다고 해도 대체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슬롯 머신 규칙 써본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기 문체 같은 것도 없었다. 소설 쓰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고, 문학 이야기를 나눈 만한 친구도 없었다. 다만 그때는 '혹시 음악을 연주하듯이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건 분명 멋진 일이겠지라고만 생각했다. - P404
슬롯 머신 규칙는 음악에서 글쓰기를 배웠다 한다. 음악을 연주하듯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슬롯 머신 규칙. 글을 쓰는 건 마치 재즈 연주하는 것과 같단다. '자연스럽고 기분 좋으면서도 확실한 리듬' 위에 언어라는 멜로디를 입힌다. '매끄럽고 아름다운' 어휘의 배열로. 그리고는 '어휘들을 지탱해 주는 내적인 마음의 울림'인 하모니를 더한다. 그 뒤를 자연스럽게 즉흥 연주가 뒤따라온다. 그러면 연주자와 작가는 고양된 기분을 느끼고 청중이나 독자들과 함께 그 감동을 공유할 수도 있다. 과연 누가 이보다 더 멋진 비유로 글쓰기를 표현할 수 있을까. 잡문집의 글로 그를 이해하면 할수록 그의 소설이 궁금해진다. 그가 쓴 소설을 읽고 나면 왠지 멋진 재즈 공연을 보고 난 거 같은 느낌이 들 거 같기도.
브런치 작가가 되기 전의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기 쓰기였다. 꿈에 그리던 유니폼을 입고 비행기로 출근하던 그 빛나던 시절이 가장 외로웠던 시절이기도 했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흩날리는 머나먼 중동 땅에 이민가방 두 개와 함께 뚝 떨어진 24살. 그 낯선 땅에서 마음의 친구들을 만나긴 했지만 우리가 스케줄이 맞는 날은 많지 않았다. 어제는 함부르크 강가를 거닐다 오늘은 뉴욕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꿈같은 나날들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철저하게 또 혼자였다.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우울증이 시작되었고 인지했으며 나아지기 위해 노력한 것이 글쓰기였다. 좋은 책 한 권과 일기장을 몸의 일부처럼 항상 지니고 다녔다. 수시로 나와 대화를 시도했다. 빈 스프링 줄노트에 슬롯 머신 규칙 일과보다는 그날의 내 마음을 써 내려갔다. 그때부터 쭉 대화하듯 글을 쓴 거 같다. 나와 나의 대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 쓸 필요 없이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있어서 무엇보다 좋았다. 깨알 같이 못난 내 글씨가 조금은 거슬리긴 했지만.
내가 슬롯 머신 규칙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이야기를 쓰고, 사람을 울리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웃게 만들어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나갑니다. - P92
슬롯 머신 규칙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꽤나 멋있다. 그는 소설을 통해서 개인이 지닌 존엄과 가치를 깨닫게 하고 싶어 한다. 그걸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듯 그는 진지하고 정성스럽다. 슬롯 머신 규칙에 비하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너무나 하찮고 이기적이다. 누구를 어떻게 만들 겨를도 실력도 나에겐 없다. 말할 사람이 없어서 글로 대화를 해야 했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자 무작정 썼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글쓰기 연습을 시작한 지 오늘로 74일째다. 이렇게 쓰는 일상을 이어간다면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아직은 내 안에 있는 생각도 안간힘을 써야 겨우 꺼낼 수 있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나도 울림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담담하게 써 내려가는 내 글이 읽는 사람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으며 나와 대화할 수 있기를. 나에게서 소소한 위안과 평온을 받기를 감히 바라본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 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어 담는 거야." - 텔로니어스 멍크 슬롯 머신 규칙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드넓은 미지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비옥한 대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다. - P406
나도 화려한 문체보다는 일상의 언어로 최대한 담백한 슬롯 머신 규칙 쓰고 싶다. 담백하지만 울림을 담은 글. 되도록 간단한 문장으로 풀어쓰려고 노력한다. 수식어가 과하지 않은지 늘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와 특별한 울림을 부여' 할 수 있을까. 많이 읽고 많이 관찰하고 많이 생각하면 되려나. 앞으로도 슬롯 머신 규칙 쓰며 계속 고민 할거 같다. 내가 나아갈 방향이자 나에게 던져진 숙제처럼.
마흔 살이 되면 조금은 나은 슬롯 머신 규칙 쓸 수 있겠지, 라며 계속해서 썼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 P62
29살에 소설 쓰는 걸 시작한 슬롯 머신 규칙는 조금 나은 글을 쓰게 되는 마흔 살을 기대하며 멈추지 않고 계속 썼다고 한다. 마흔을 훌쩍 넘기고야 글 쓰기를 시작한 나. 그럼 나는 어떡하나. 오십이 되면 되려나. 아님 더 기다려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