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능 프로를 보다가 '지디 온라인바카라'이라는 자막에 멈칫했다. 광희의 '지디 따라하기 패션'을 놀리는 맥락에서 나온 건데, 지디 온라인바카라이란 지디가 아니란 얘기다. '천재 온라인바카라'은 천재가 아니고(지올 팍과 전소연이 자주 소환됨), '금수저 온라인바카라'은 금수저가 아니다(찐 금수저 '아옳이' 유튜브에서 언급). ’유사 000'을 조롱하는 의도의 밈으로, 유래는 '피해 온라인바카라'이다. 말하자면 '피해 온라인바카라'은 피해자가 아니다. 유튜브에선 종종 봤어도, KBS 예능에서 보니 난감했다.
2. '피해 온라인바카라'이란 단어가 대중화된 건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불거졌을 때부터다. 2020년 박 전 시장을 고소한 전직 비서를 두고 더불어민주당은 '피해 온라인바카라'이란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박 전 시장을 두둔하기 위해서였다. 그전까지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하며 '피해자', '피해 여성'이란 단어 써온 것과 대비되는 태도였다.
3. 형사법에서는 판결 확정 전이라도 '피해자'로 통일한다. 범죄 피해가 무고로 판명되기 전까지 '피해자' 신분을 미리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권의 난데없는 '피해 온라인바카라' 호명이 언론에 쏟아지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불거졌다. 김부겸 전 의원은 '피해를 호소하는 고소인(;;;)'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논란이 된 후 피해자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4. 호소는 문제인가? 최인숙 인권위 조사관이 쓴 <어떤 호소의 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피해자들의 호소를 다정하게 담는다. 본래 '호소'란 억울하거나 딱한 사정을 남에게 간곡히 알린다는 의미다. 피해자는 호소한다. 그러나 '피해 온라인바카라' 이후, 피해는 부정되고, 호소는 오염되었다.
5. "핵인지 감수성."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를 비판하기 위해 민주당 권칠승 대변인이 사용한 단어다. '성인지 감수성'을 비튼 야당의 신조어다. 민주당의 성인지 감수성은 박 전 시장이 사망한 이후에도 그대로다. 급기야 박용진 의원은 '핵공유 온라인바카라'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더 나빠졌을 수도 있다.
6. 민주당이 일말의 반성도 없을 때, 집권 여당은 대비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 과연 어떨까?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이 대통령의 외교 성과를 끌어내린다며 이렇게 말했다. “대규모 방일 선동 가스라이팅을 벌인다” 여야에 싸움에 성인지 감수성은 없고, 받아쓰는 언론만 있다.
7. 페미니즘 리부트와 미투 운동 이후 다양한 단어들이 등장했다. 미투, 성인지감수성, 가스라이팅 등... 정치권은 해당 용어의 맥락은 제거하고 특정한 이미지만 추출해 자극적으로 재활용한다. 용례에 맞지 않는 단어의 화제성만 빌린다. 이때 단어 본래의 의미는 휘발되고 기호는 멀리 떠난다. 이를테면, 빚투와 가스라이팅. 최근 강형욱 훈련사 유튜브에 올라온 썸네일은 '말티즈 가스라이팅'이다.
8. 언어는 원래 오염되고 확장된다. 누군가 어떤 단어를 쓰는 이유는 악의가 있다기보단 그저 유행하기 때문이다. 빅데이터 전문가 정유라는 <말의 트렌드에서 ‘밈해력’은 시대를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단어가 누구를 소외하는지 민감하게 지켜보며 신조어를 즐기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감히 그 단어를 쓰다니!"식의 범람하는 지적이 PC하단 불만도 이해간다.
9. 그런데 유독 'OO 온라인바카라'이란 단어 앞에서 내 마음은 조급해진다. 이 단어에 상처받을 분명한 한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처럼 유튜브를 보다가, TV를 보다가 마주하게 될 상황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박원순이 사망한 그해, MBC 입사 시험에는 피해자를 무엇이라고 부를지 서술하란 문제가 나왔다. 이를 알게 된 피해자는 "내가 방송국 앞에서 죽으면 믿어줄까요?"라고 했다.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잔디 씨는 작년 생존 기록을 출간했다. 책 제목은 다음과 같다.<나는 피해온라인바카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