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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닐니리 슬롯 머신

타이핑을 하다가 손톱이 느껴지는 순간은 갑자기 찾아오곤 한다. 어제만 해도 괜찮다 싶은 머리가 오늘은 견딜 수 없는 산발이 된다. 분명 손톱이고 머리카락은 꾸준히 자라왔을 터인데, 그걸 느끼는 순간은 왜 그렇게 언제나 갑작스럽기만 한 것일까. 슬롯 머신도 그랬다. 양말을 신기 위해 허리를 굽히다가 손끝이 떨리던 어느 날이었다. 야 이거 심각하구나. 나와 양말 사이를 가로막는 뱃살의 위엄을 느끼는 그 날은 그렇게 내게 갑자기 찾아오곤 했다.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던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펑퍼짐한 뱃살을 보고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강연을 듣는 내 옆모습에서 삐져나온 뱃살이 유독 도드라지던 날은, 의사 선생님이 고지혈증을 지적하던 그 날보다 훨씨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왜 이런 깨달음은 언제나 갑자기 들이닥치는 것인지. 다시금 심호흡을 하고 이 글을 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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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액터정이 정색을 하고 말한다. 스몰 스텝 실무진이 간만에 모인 자리였다. 평소 눈에 낀 눈꼽도 서슴없이 말하던 사람인지라 나도 모르게 차렷 자세가 된다. 살 쪘다는 말에 얼굴이 부은 것이라고 손사래를 쳐본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가소로운 팔딱거림이다. 냉정한 액터정은 그 어설픈 몸무림엘 단칼에 잘라낸다. '살 찌셨어요.' 그렇다. 요즘처럼 입맛이 좋았던 적이 없다. 하루 슬롯 머신를 매일 걸었지만 먹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다시금 비장한 각오를 한다. 그런데 때마침 주문한 음식들이 등장한다. 양꼬치, 꿔바로운, 굴짬뽕까지... 남의 속도 모르고 주인장은 만두 서비스까지 내 놓는다. 왜 그렇게 다이어트가 힘든지를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저께는 불광동을 걸었다. 워크샵을 마치고 나면 어떤 상황에서도 빈 속이 된다.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내기 때문이다. 돌산이 보이는 고즈넉한 동네는 왠지 모르게 고풍스럽다. 골목은 구비 구비 곡선으로 뻗어 있고, 어쩌다 만난 가게들은 시간이 멈춘 듯 옛모습이다. 귀에 꽂은 이어팟에서는 가수 요조가 나와 떡볶이를 설파 중이다. 걷기 위해 찾아간 골목이 갑작스럽게 시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시장 골목이 도무지 끝날 생각을 않는다. 골목에 지붕을 얹은 시장이 수십 미터를 이어간다. 곳곳마다 먹거리다. 이럴려고 불광동 슬롯 머신를 시작한게 아니었는데. 걸음 걸음마다 먹거리들이다. 그렇게 나는 고행을 자처한 순례자 모드가 된다. 그래도 슬롯 머신를 걸었다. 시장 골목을 빠져나와 지하철로 들어설 때쯤 뉘엿 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이 작은 동네의 절반을 노을이 덮고 있었다.



몸은 정직하다. 먹은 만큼 살로 가고 걸음 만큼 살이 빠진다. 지금은 먹는 음식의 양을 절반으로 줄였다. 그리고 매일 매일 더 많이 걷는다. 운동도 고민 중이지만 오래할 자신이 없다. 꾸준히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대신 닐니리 노래를 부르며 하루 만 보를 걷는다. 몸이 조금씩 움직이는데 익숙해진다. 약속을 잡으면 한 시간쯤 일찍 나가 주변을 걷는다. 그래도 만 보를 채우지 못하면 퇴근 길 버스를 타고 오다가도 서너 정거장 앞에서 내린다. 요즘은 언제나 걸을 구실을 찾는다. 매일매일의 몸무게는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손톱이 길어지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처럼, 닐니리 슬롯 머신로 인한 변화도 보이지 않게 진행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만 보를 걸을 예정이다. 닐니리 노래를 부르며 서울의 골목 곳곳을 누빌 예정이다.그러던 어느 날 액터정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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