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했다. 합창단에서 같은 슬롯 꽁 머니를 계속해서 부르는 일이 지겨웠다. 정기연주회에서 부를 슬롯 꽁 머니 중 몇 곡은 이미 필리핀 국제대회에서 불렀던 슬롯 꽁 머니들이었다. 이미 국제대회를 준비하면서 그 슬롯 꽁 머니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던 터였다. 그런 슬롯 꽁 머니들을 단순히 감을 잃지 않기 위한 수준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 가는 느낌으로 계속해서 연습을 하고 또 하니 너무 지겹게 느껴졌다. 이미 국제대회에서 불살랐던 곡들인데 말이다. 몇몇 곡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자, 이내 다른 곡들도 지겹게 느껴졌다. 사실 모두 일 년 내내 연습했던 곡들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정기연주회를 일주일 정도 앞두었을 때 즈음, 감기에 심하게 걸렸다. 목이 너무 아팠고, 기침이 심하게 나왔다. 연습은 당연히 못 나갔고, 일주일 동안 앓으면서 지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기연주회를 빠질 수는 없었다. 모두들 감기에 걸려 골골거리는 상황이었고, 한 두 명씩 빠지다가는 무대에 설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정기연주회에 올랐다. 소리는 거의 내지 못했고, 립싱크로 채울 때도 있었다. 무대에서 기침을 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정기연주회가 끝나고 합창 권태기가 찾아왔다. 안 그래도 연습이 지겹게 느껴지던 차였다. 거기에 무리해서 무대에 오르기까지 했더니 이제 아무런 의지가 남아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공연이 끝나고 나면 목표가 사라지면서 의욕이 줄어들기는 한다. 하지만 이런 나를 보고 있자니 역시 사람은 슬롯 꽁 머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의 합창단에 들어올 때 내가 가장 기대했던 점은 연습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 참여했던 동아리 합창단은 방학에는 연습이 없었다. 그리고 정기연주회가 열리는 2학기에 주로 연습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시험기간에는 연습을 쉬었다. 그러다 보니 일 년 중에 노래하는 날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방학이 되면 슬롯 꽁 머니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20년도 1월에는 이태원에서 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모이는 합창단을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20년도 2월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유행했고, 연습과 공연 일정은 무산되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슬롯 꽁 머니를 하지 못하면서 슬롯 꽁 머니에 대한 갈증은 커져만 갔다. 그러다가 23년도 2월, 드디어 지금 슬롯 꽁 머니하는 합창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합창단에서 슬롯 꽁 머니하면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단원들이 나에게는 엄마뻘이었기에 불편한 말들을 서슴없이 던졌다. ‘결혼은 언제 하니’, ‘머리 좀 길러라’, ‘화장은 왜 안 하니’, ‘안 꾸미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그런 말들 말이다. 게다가 합창단을 운영하는 방식도 이상했다.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일로 만들었고, 또 사적인 일을 공적인 일로 만들었다. 절차와 타당성, 역할의식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롯 꽁 머니를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버텼다. 무엇보다도 합창을 할만한 적당한 곳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렇게 버텼지만 결국에는 슬롯 꽁 머니에 질려버렸다.
사실 지금 합창단에서 언제까지 슬롯 꽁 머니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연습 시간이 평일 오전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퇴직을 하고 자유롭게 지내고 있기 때문에 활동이 가능하다. 그전에 일했던 직장은 주 5일 근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합창단 연습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게 된다면, 아마 지금 활동하는 합창단은 그만두어야 할 테다.
지금의 슬롯 꽁 머니 상태로는 그렇게 그만두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내 슬롯 꽁 머니을 보고 있자면 사람의 슬롯 꽁 머니은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를 하지 못할 때에는 노래를 너무나 하고 싶어 했고, 막상 노래를 질리도록 하니 노래에 흥미를 잃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동안 쌓인 모든 것에 질려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지금은 노래를 좀 쉬어야 할 때인 듯하다. 국제합창대회, 정기연주회에 더해 그 밖에 소소한 행사들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지금 잠시 쉬면 또 노래하고 싶은 슬롯 꽁 머니이 돌아오겠거니 싶다. 마침 오늘 연습을 마지막으로 올 한 해의 연습이 마무리된다. 새해가 밝기 전까지 약 2주간의 짧은 방학이 있다. 우선 그 기간 동안 쉬어보고, 그 다음에 생각을 다시 해 보아야겠다.
ps. 나의 투정을 들은 애인은 이렇게 말했다. ‘하기 싫다고 안하면, 하고 싶을 때 못해’ 너무 맞는 말이다. 동시에 이 친구는 어쩜 이렇게 생각의 폭이 넓은지 감탄하게 된다. 오래오래 옆에 두고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