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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발 필살로 메이저 바카라를 끝장내다(上)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소련 여성 메이저 바카라들 (1941~1945)

메이저 바카라소련군 여성 메이저 바카라들


“알리야 몰다굴로바는 불멸의 메이저 바카라입니다. 카자흐 인민들에게 그녀의 위업과 사심 없는 조국에 대한 헌신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 여성 메이저 바카라로 전사한 알리야 몰다굴로바의 부대장이 그녀의 출신인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쓴 편지 중 -


1942년 9월 27일 오후 미국 시카고의 ‘솔저 필드(Soldier Field)’ 경기장에는 평소와 다른 특이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경기장은 미시간 호수 바로 옆에 위치하여 찬바람이 다소 불고 있었는데 운집한 2 만여 명의 관중들은 행사를 기다리며 차분히 대기 중이었다. 이 날의 행사는 ‘소련전쟁지원 미국위원회(American Committee for Russian War Relief)’ 주최로 실시되었는데 독일과의 사투를 벌이는 소련과 그 국민들을 돕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행사의 주인공들은 소련에서 조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머나먼 미국 땅까지 직접 건너온 다양한 소련인들이었다. 우선 메이저 바카라로서 당시까지 독일군 150명 이상을 사살한 블라디미르 프첼린체프(Vladimir Pchelintsev)가 나왔는데 그는 소련의 절대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며 미국인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이후 다른 소련인들이 나와서 비슷한 내용으로 미국인들에게 호소했다. 경기장의 청중들은 박수로 화답했고 자선 기금 모금을 위한 인원들이 모금함을 들고 청중 사이를 이동했다. 이때까지는 미국 여기저기서 수차례 벌어졌던 의례적인 자선 행사의 모습이었고 이날도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잠시 후 160cm 정도의 아담한 체구를 가진 한 여성이 소련군 군복을 입고 나타났다. 사람들은 갑자기 등장한 소련 여군의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그녀는 연설하기에 앞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많은 관중 앞에 상당히 긴장한 듯 보였다. 하지만 작은 체구의 여성은 곧 모든 긴장을 털어내고 사자후를 토하기 시작했는데 강한 러시아어 억양으로 앞에 있는 미국인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저는 26살이고 지금까지 309명의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사살했습니다. 여러분, 당신들은 지금까지 제 등뒤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숨어 지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소련이 나치에 대항해서 홀로 싸우고 있음을 강조했고 서구 연합군들이 빠른 시일 내에 유럽에서 ‘제2전선’을 열 것을 호소했다. 현장의 미국인들은 우선 그녀의 당찬 연설 내용에 놀랐는데 무엇보다도 그녀가 309명의 추축군을 사살한 메이저 바카라라는 점에 다시 한번 놀라며 곧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류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Pavlichenko)’로서 소련군 25 소총사단 소속의 여성 메이저 바카라였다.


금단의 영역에 들어메이저 바카라

메이저 바카라참호에서 임무 수행 중인 <죽음의 여인, 류드밀라 메이저 바카라

1941년 6월 독일군의 침략 이후 소련군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며 무너지고 있었다. 적의 공격 직후 스탈린이 전례 없이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며 실시한 연설은 나름 효과가 있었는데 수많은 소련인들이 자원입대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의 자원자들은 남자였지만 조국을 수호하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는 여성들의 애국심도 남성들 못지않았다. 많은 자원 여성들이 간호사나 후방의 전투 보조 부대 등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의 역할을 넘어 직접 전투에 참여하려는 이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의 열정은 그 누구보다도 높았지만 남성 대비 여성에게 신체적 제약이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소련 당국은 여성 지원자들을 좀 더 특수한 분야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비행기를 조종하는 항공 분야였고 또 하나는 메이저 바카라 병과였다.

25세의 류드밀라 파블리첸코가 나치의 침공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우크라이나 키이우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파블리첸코는 러시아 내전 시에 적기 훈장을 받은 공산당원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는데 유년기부터 육상을 비롯한 운동을 좋아하는 대단히 활동적인 소녀였다. 그녀가 좋아했던 또 하나의 취미는 의외로 총을 쏘는 것이었는데 키이우의 정부에서 운영하는 사격클럽에 가입했고 소총 사용법과 실사격을 경험했다. 사실 소련은 다가오는 나치와의 대결을 기정사실화했고 미래의 전쟁에 대비를 위해 전국에 이러한 준군사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마침 1934년에 나온 소련 선전영화 ‘차파예프(Chapaev: 러시아 혁명기의 실제인물 ‘바실리 차파예프’에 대한 전기영화이다)’에서 여자 주인공이 기관총을 쏘며 반혁명 군(백군)을 막아내는 장면에 많은 소련 소녀들이 열광했는데 파블리첸코도 그러한 소녀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사격을 하는 과정에서 나름 자질이 있는 명사수로서 인정을 받았고 관련 자격증까지 취득하게 된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군에서 실시하는 추가적인 저격 과정도 이수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전쟁이 발발했을 때 파블리첸코는 남쪽 오데사(Odessa)의 모병소에 가서 메이저 바카라로서 근무하기를 희망했으나 모병관은 이 ‘작은 체구의 여성’에게 간호사가 될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파블리첸코는 자신의 과거 경력을 알려주며 적극적으로 어필했고 결국 모병관을 설득시켜서 저격병으로 배치되는데 성공했다. 과거의 우수한 경력이 있는 데다 전황이 워낙 급박하여 그녀는 별다른 훈련도 받지 않고 남부 전선 오데사 인근의 제25소총사단에 배치된다. 파블리첸코는 소총 중대에 2명씩 있던 저격병이 되었는데 문제는 무기의 부족으로 인해 저격 임무를 부여받은 그녀에게 총이 지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동안 파블리첸코는 손잡이가 달린 수류탄 하나 만을 들고 선임 부대원들을 따라다니며 참호를 파거나 통신선을 매설하는 등 부차적인 임무를 담당하였다. 소총이 없는 저격병으로서 이런 지원 업무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7월 말에 우연히 기회가 오게 되었는데 다른 메이저 바카라 동료가 포탄에 부상당해 후송되었고 그의 총이 마침내 파블리첸코에게 지급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사용할 총은 이미 사격 클럽에서 수도 없이 사용해 보았던 구형 모신-나강(Mosin–Nagant) 소총이었는데 5발을 장착할 수 있었고 저격용 스코프가 달려있었다. 전선에서 대기하며 기회를 엿보던 파블리첸코는 8월 8일에 드디어 루마니아군 2명을 저격하며 그 전설적인 ‘저격 레이스’를 개시했다. 그녀는 오데사 포위전이 진행되는 동안 최전선에 배치되어 적군을 저격했는데 투입한 지 최초 두 달 반 동안 무려 180명 이상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을 사살했다. 파블리첸코는 이때부터 추축군 사이에서 ‘죽음의 여인(Lady death)’이란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된 직후 21세의 나탈리야 코브쇼바(Natalya Kovshova)는 모스크바의 국민방위대에서 적 항공기 감시 및 통신 임무를 맡으며 복무 중이었다. 모스크바 동쪽의 우파(Ufa)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마친 후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항공기술연구소에서 일자리를 얻은 그녀는 모스크바 항공학교에서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독일군의 침공은 코브쇼바의 인생행로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자신과 많은 지인들의 삶을 바꾸어 놓은 독일군을 맹렬히 저주했고 일선에 나아가 적군에 대항하고 싶어 했다. 국민방위대를 벗어나 최일선 부대에 지원한 코브쇼바는 단기간의 메이저 바카라 훈련을 받은 후 북서전선군 소속 130 소총사단에 배치되었고 1941년 10월부터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녀의 부대에는 항공기술연구소에서 알게 되었던 마리아 폴리아노바(Mariya Polivanova)도 있었는데 둘은 곧 친구가 되었고 저격팀을 이루어 함께 활동하게 된다. 코브쇼바가 사수 역할을 했고 폴리아노바는 표적을 확인하는 관측수 및 정찰병 역할을 맡았다. 이 두 여성들이 전장에 투입되었을 때 독일군은 모스크바 진공을 위한 ‘태풍 작전(Operation Typhoon)’을 개시했는데 소련 입장에서는 전쟁 중 최대의 위기에 처했던 시기였다. 코브쇼바와 폴리아노바는 즉시 전방에 투입되었고 최전선에서 자신들의 팀워크와 능력을 유감없이 증명해 보였다. 이들은 전선에 있는 덤불이나 은폐지에 숨을 죽이며 장시간을 기다리다가 통상 400미터 이내로 적이 시야에 들어오면 저격을 하곤 했다. 두 명의 여성들은 그 해에 일찍 찾아온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온종일 배를 땅에 대고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적을 해치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코브쇼바 팀은 얼마 되지 않아 수십 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실력과 명성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는데 저격은 물론 포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 연대장을 직접 살려낸 적도 있었다. 일선에서 성공적인 저격 임무를 계속 수행하던 코브쇼바는 1942년 초부터는 때때로 신병들에게 소총 사용 방법과 자신의 저격 노하우를 가르치는 교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십 명의 메이저 바카라들이 전선에서 임시방편으로 배출되었던 것이다. 독일군 입장에서 소련의 메이저 바카라는 ‘소리 없는 공포’ 자체였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병사들이 한 명씩 쓰러지면 남아있는 부대원들은 다음이 자기 차례가 아닐까 생각하며 엄청난 두려움에 떨게 된다. 또한 이들을 지휘해야 하는 장교들조차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저하며 숨어있을 뿐이었다(이러한 이유로 독일군에 포로가 된 메이저 바카라들은 대부분 극심한 고문을 받은 후 죽게 된다. 이것은 소련 측도 마찬가지였다). 저격은 최소의 인원으로 적에게 최대의 희생과 심리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전술이었다(코브쇼바와 폴리바노바 저격팀은 1942년 8월 둘이 함께 전사할 때까지 도합 300명 이상의 독일군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날마다 수천 명의 자국군이 독일군에게 죽어 나가던 소련군 입장에서 소수의 특별한 메이저 바카라는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여성 메이저 바카라들의 활약은 공산주의 사회인 소련에서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체제 선전의 훌륭한 증거물이었다.

소련 당국은 파블리첸코나 코브쇼바와 같은 ‘여성 슈퍼 메이저 바카라’의 활약에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고 많은 장점을 발견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군은 이들을 대량으로 양성하기 위한 본격적인 계획을 세우게 된다.


본격적인 여성 메이저 바카라의 양성

메이저 바카라<중앙 여성 메이저 바카라 훈련학교 교관과 훈련생들의 모습(1943)

1942년 3월 20일 모스크바 함락의 위기를 벗어난 소련 국방인민위원회는 지난 몇 달 동안 보여준 몇몇 여군들의 놀라운 저격 능력에 보답을 하듯이 저격 훈련을 위한 여군 학교 설립을 명령했다. 그 장소는 모스크바시의 동부에 위치한 베슈냐키(Veshnyaki)였는데 학교는 공식적으로 <중앙 여성 메이저 바카라 훈련학교로 명명되었고 소련 전국의 우수한 여성들이 지원하기 시작했다. 지극히 위험하고 특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저격의 특성상 지원자들의 선발 조건은 대단히 까다로웠다. 모든 지원자는 최소 20세 이상에 (하지만 전시인지라 종종 그 이하의 나이도 입학을 허가받았다) 신체적으로 건강해야 했으며 소련 학제 기준으로 중등 7개 학년을 이수해야 했다. 체력, 정신력 그리고 지력까지 살피며 우수한 인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상향된 조건이었다.

두 달의 기간이 흘렀고 1기 입학생 선발이 종료되었다. 훈련생들은 5월 3일에 입교 선서와 사열 및 행진을 하며 입학식을 실시했고 이후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다. 교육생들은 자신들이 선발된 ‘정예 중의 정예’라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는데 그만큼 교육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기초 체력을 기르는 단체 구보 및 체조에 이어 소총 분해 조립/결합, 실제 사격 등 메이저 바카라로서의 기본적인 것들이 무제한적으로 반복되었다. 또한 적진에 은밀히 침투하고 지형지물을 활용하거나 나뭇잎 등을 이용하여 위장하는 법과 위급 상황에서의 응급처치 방법 등이 집중적으로 교육되었다. 장시간 움직이지 않고 대기하며 기회를 포착해야 하는 메이저 바카라의 특성상 심리적인 안정과 인내심을 유지하는 훈련에도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이러한 훈련 프로그램에는 추운 겨울에 10~12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견디는 것과 적진 근처에서 배설물을 만들지 않도록 적게 먹고 마시며 버티는 것도 포함되었다. 실제로 여성들이 남성보다 인내심이나 집중력 또는 추위에도 더 강했고 모든 훈련 과정을 잘 소화해내고 있었다. 총교육에는 근 1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1943년 6월부터 교육을 마친 여성 메이저 바카라들이 일선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전선의 상황과 수요에 따라 매월 50명에서 많게는 200명의 졸업생들이 전장으로 향했다. 당시 소련군 내에서는 많은 여군들이 일선에서 남자 군인들에게 성적인 희롱이나 추행을 당하는 등 말 못 할 고통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거친 일선의 남성 부대원들조차 '여성 메이저 바카라들'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동등한 전우로서 대우를 해주었다. 이들의 임무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남성 부대원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 메이저 바카라들을 인정하고 존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선에 배치된 여성 메이저 바카라들은 하나, 둘씩 전설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편에서 메이저 바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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