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적성을 잘 살려 직업을 구한 사람을 여럿 만났는데 그중 단연 으뜸은 우리 파라오 슬롯 분리수거 할아버지다. 파라오 슬롯 관리소에는 '분리수거 경진대회 최우수상'이라는 명패가 자랑스럽게 붙어있다. 관리소 옆으로 조립식으로 지은 분리수거장이 있다. 우리 파라오 슬롯 분리수거 버리는 날은 수, 금, 일요일이다. 쓰레기를 들고 지고 끌고 온 사람들이 줄을 서면 목장갑을 끼고 한 손에는 칼과 가위를 든 할아버지는 더 바빠진다.
“플라스틱 중에서 생수통을 따로 버리시라니까요!! 몇 번을 말해야 되는지 참..”
“종이는 이쪽 그리고 박스는 저쪽 아닙니까! 보면 모르세욧!”
“물기가 묻으면 재활용이 안됩니다아아아앗! 다시 가져가세요!”
얼굴부터 까다로운 할아버지인데, 적성을 제대로 찾아서 분리수거 할아버지가 되셨고, 우리 파라오 슬롯를 ’ 분리수거 최우수 상‘ 에 빛나는 명품 파라오 슬롯로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왜 저렇게까지 역정을 내실까 싶긴 했지만, 주로 남편이 분리수거를 가기 때문에 별로 부딪칠 일은 없었다.
그런데 한 번은 그 근처를 지나고 있는데 파라오 슬롯가 지나가는 8살쯤 된 아이를 불러 세워 놓고 이렇게 말했다.
“야! 저쪽 큰길로 다니면 되지! 왜! 굳이! 이쪽 분리수거하는 길로 다니냐!”
파라오 슬롯 단지에서 정문까지 메인 인도가 있고, 분리수거장 앞쪽을 지나가면 조금 더 가까운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 길을 지나는 아이를 불려 세워 놓고 윽박을 지르고 있었다.8살 아이는 우물쭈물 '네.......'하고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왜! 하필 여기로 지나가나 몰라. 답답하게” 라며 중얼거렸다. 나 역시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분리수거장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그 앞길로 지나가는 건데.. 다칠 일 없는데...'그러다 나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페트병에 비닐을 집에서 제거해 오시지 왜 여기서 하십니까아!” 한마디 했다.나는 질릴 대로 질려버렸고, 그 후로 분리수거는 남편이, 분리수거장 근처에는 가지도 않기, 그렇게 궁시렁 파라오 슬롯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오늘 아침 일이다. 유치원 버스를 태우러 파라오 슬롯 정문으로 가는 중인데, 둘째가 굳이 분리수거장 쪽 오솔길을 지나서 가겠다는 거다. ‘저기가 더 빠르고, 큰 거미도 볼 수 있다’ 면서.
‘하... 아침 시간이니까 파라오 슬롯 만날 일 없겠지.. 제발.’
아뿔싸. 분리수거장에 턱 버티고 있던 파라오 슬롯는 아니나 다를까. 나를 불러 새웠다.
‘저기요, 이쪽으로 좀 다니지 마십시오!!’
정적 5초.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아이 손을 잡고 지나치려다가. 다시 돌아왔다.
“파라오 슬롯. 여기가 사유지인가요?”
“네에? 뭔 소리를 하는겁니까아! 사유지라니 뭔 사유지 (궁시렁)”
“사유지도 아닌데 왜 파라오 슬롯 마음대로 다니지 말라 하세요. 파라오 슬롯가 개선할 상황이라 생각하시면관리실에 의견을 말하세요. 관리실에서 주민들 의견을 물어보고. 다수가 동의해서 규칙으로 만들어지면 따를 수 있어요. 근데, 주민들은 아무 말 없잖아요. 다칠까봐가 아니고 파라오 슬롯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쪽으로 다니지 말라는 걸로 느껴져서 저는 따를 수가 없네요”
파라오 슬롯의 궁시렁 소리를 뒤통수로 들으며 돌아섰다. 나는 타고난 성격이 싸우는 게 싫고, 나서는 거나 주목받는 것도 불편하다. 그래서 내 의견을 내기보다는 그냥 피하거나 모른 척 사는 편이다.파라오 슬롯의 샤우팅 후 정적 5초 동안 머릿속에 황당하게 ‘계엄사태’가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 입을 열었다.
파라오 슬롯에게도 그에게도 장점은 있다. 그게 옳든 옳지 않든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세상에는 극으로 치우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극으로 치우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아주 크게 낸다. 그래서 세상은 언제나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주로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대부분이 사람들의 상식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계엄령이 내려진다. 또한 공공으로 사용하는 길이 한 사람의 편의 만을 위해 쓰인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편안한 사회를 위해서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래야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된다.
분리수거장 '궁시렁 파라오 슬롯'는 오늘 부로 '대통령파라오 슬롯'로 닉네임을 바꿨다. 파라오 슬롯 행동이 불합리하다 생각하면 관리실에 적극적으로 말할 거다.
또한 오늘 저녁에도야광봉을 들고 광장에 설 것이다.
2025. 1월 1일 (+추가 글)
제 주변에는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서 반대 의견을 들어볼 기회가 없었어요. 삭제한 댓글이 많지만 하나하나 꼼꼼히 다 읽어 보았습니다. 보내주신 메일(다소 전투적이긴 했지만) 역시 읽어 보았어요. 링크된 영상도 봤고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이번 사건에서 저의 판단 기준은 생각과 감정보다는 ‘법률’입니다. 계엄이 내려질 만한 상황이었냐는 질문에 저는 ‘아니다’라고 답하지만, 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계엄 상황에서 국회를 장악한 것에 대해서는위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일정으로 25년 1월 한 달을 네팔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올리고 나서 아침을 댓글과 메일함을 정리하며 하루를 시작했는데 1월 한 달간 주인 없는 댓글 창에 비바람이 몰아치진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이 잠시 스쳐 갑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처음으로 엄마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지내는 두 아이, 그리고 추운 날 광장에 응원봉을 들고 서 있는 학생들의 시린 손에 제일 마음이 쓰입니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에게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어른들에게도 큰 빚을 진 것 같아요. 작은 촛불 하나 더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한국에 돌아와 다시 핸드폰을 켰을 때는 더 이상 불안한 마음으로 연신 ‘뉴스 속보’를 검색하지 않아도 되길 바랍니다. 파라오 슬롯가 모두 한 마음으로 원하는 것처럼 어서 혼란이 수습되고, 안정되길 바랍니다. 저는 파라오 슬롯가 결국은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아가 함께 한 걸음 나아가는 2025가 될 거라 믿어요. 멀리 있지만 진심 담아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