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 블룸은 슬롯 머신 프로그램 생각을 하며 더블린 거리를 배회한다. 이 시간은 그의 내면 독백을 통한 사색으로 채워지는데 그래서 이 에피소드에서는 그의 식성을 비롯해 다양한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캔디상점에 진열된 파인애플 사탕, 레몬 캔디, 버터 스카치.
끝물 살구, 첫물 무화과, 사철 라임, 이렇게 쓰면 사전 찾아가며 해석하는 한국어가 될 듯하다. 조이스의 이번 에피소드를 읽는 데는 배경 설명 포함해서 긴 시간이 걸렸다. 아일랜드 영단어, 조이스 합성어, 묻지마 식 무의식의 문장 조합들이 좋아하는 겨자를 울며 꿀떡 삼키는 식이랄까. 그 사이 집을 샀고 유튜브로 한국 정세를 주시하며 직장에선 방학을 맞았다. 이제 크리스마스 열기도 지나가는데 글이라는 게 리듬이 끊겼는지 다 읽고도 얼른 써지지 않았다. 이방인의 문학을 대략 소화했으니 몇 글자라도 남겨야 하지 않을까 뒤척이다 뒷마당에 나가 영근 과일을 따왔다. 이 집에서의 마지막 여름 마지막으로 향유하는 오가닉 살구를 씹으며 의식의 흐름대로(제멋대로) 써보기로 마음 먹었다. 파인애플 사탕, 레몬 캔디, 버터 스카치보다 백배 낫지. 캔디상점을 지나는 슬롯 머신 프로그램도 불량식품이라고 했다. 예전에 한국 초코파이에 반한 친구가 있었다. 한번 맛보고는 이런 걸 왜 이제 주냐고 항의했고 그 후 팬트리에 넣어 둔 초코파이 한 봉지를 나 몰래 까먹었더랬다. 바른생활맨의 달콤한 치아가 저지르고 만 귀여운 경범죄가 어째 슬롯 머신 프로그램의 이미지와 오버랩된다.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못 내지만 은근 장난기가 장난이 아닌 것이 둘이 은근히 닮아있다. 캔디상점 창문에 붙은 왕실 면허를 보며 슬롯 머신 프로그램은 당시 영국 왕 에드워드 7세가 왕좌에 앉아 주주베 캔디를 빠는 모습을 상상한다.
지나가는 YMCA 청년이 그의 손에 들려준 전단지에는 미국의 복음 전도사 존 알렉산더 도위 박사가 더블린에 온다는 소식이 ‘엘리야가 온다!!’ 라는 선전 문구와 함께 실렸다. 유료 게임이다. 신앙 부흥. 일부다처. 자칭 엘리야! 딱 걸렸다. 슬롯 머신 프로그램 눈엔 사이비 싹쓸이. 어느 버밍햄 회사의 빛나는 십자가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인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어느 날 밤 부엌 찬장에서 본 코드피쉬(대구)의 은청색 빛이었다.
딜런 옥션장 앞에서 사이먼 디덜러스의 딸내미 중 하나가 서성이고 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너덜 해진 옷, 삐쩍 마른 몸, 엄마가 죽고 가정이 말이 아닌 것 같다. 그녀는 열다섯 아이를 낳았다. 매년 빠지지 않고 낳은 셈이다. 그것이 카톨릭 교리였고 그렇지 않으면 신부는 그녀에게 고해성사도 사면식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궤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집과 가정이 그녀를 삼켜버리는. 종교는 사랑하는 자식과도 멀어지게 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내려놓을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 독신인 신부 본인들은 안 보이는 데서 혼자 배불리 잘 먹고 잘 살 거다. 그 집 가정부를 꼬셔도 알아낼 수는 없겠지만. 유대교 천주교 기독교 세 종교에 다 소속되어 보고도 소리 내어 비판할 오지랖 같은 건 없는 무소속 이방인 슬롯 머신 프로그램은 소외되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상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
요약은 한도 끝도 없이 길고 지루할 것 같아 각설하고 읽다가 빵 터진 두 군데로 직진해야겠다. 이 에피소드에서 주요 모티프가 되는 블레이지즈 보일란이라는 작자가 있다. 앞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2주 후 벨파스트에서 있을 몰리의 콘서트 투어 매니저이다. 그 보일란이 몰리를 만나러 4시에 집으로 온단다. 보일란과 몰리의 임박한 정사를 의식밖으로 몰아내려고 음식등 갖은 상념에 빠지려 하지만 불쑥 치고 들어오는 그놈의 존재감. 슬롯 머신 프로그램에게 보일란은 더블린 최악의 빌런이다. 유명한 바람둥이와 아내의 어페어를 알면서도 그가 비켜가는 데는 부부만의 속사정이 있긴 한데 그 와중에도 슬롯 머신 프로그램은 몰리에게 사 줄 선물을 물색한다.
톡 쏘는 겨자를 얹은 발냄새 나는 녹색 치즈 슬롯 머신 프로그램
아, 배고파.
블룸은 가벼운 슬롯 머신 프로그램을 하러 데이비 번즈 펍에 들어섰다.
뭘 먹지? 어디 보자. 샌디가프 칵테일?
—안녕, 슬롯 머신 프로그램. 노우지 nosey 플린이 코너에서 아는 체했다.
—안녕, 플린
—일은 잘 돼가?
—엄청… 어디 보자. 버건디 한 잔 하고… 치즈 슬롯 머신 프로그램 되죠?
—네, 손님. 바텐더가 대답했다.
—와이프는 잘 있나?
—잘 있어. 고맙네. …. 슬롯 머신 프로그램, 고르곤졸라 치즈 있죠?
—네, 손님.
노우지 플린은 그의 잔을 홀짝인다.
—와이프 요즘도 노래 하시나?
—이달 말 빅 투어가 잡혀 있다네. 아마 슬롯 머신 프로그램봤을걸?
—아니. 오, 멋진데. 누가 주관하는 건데?
바텐더가 슬롯 머신 프로그램와 와인을 가져왔다.
—얼마요?
—7 펜스요, 손님… 감사합니다 손님.
블룸은 슬롯 머신 프로그램를 길게 잘랐다.
—겨자 드릴까요, 손님?
—네, 땡큐.
그는 빵조각에 노랗고 걸쭉한 슬롯 머신 프로그램 찍어 발랐다.
—주관하는 거? 글쎄, 그게 회사 개념 같은 건데 지출도 나누고 이익도 나누는.
—아, 이제 기억난다. 누가 그랬더라? 블레이지즈 슬롯 머신 프로그램 관여하지 않나?
겨자의 열기가 주는 충격이 슬롯 머신 프로그램의 심장을 깨물었다. 눈을 들어 냉혹한 시계의 시선과 마주했다. 두시. 펍 시계는 오분 빠르다. 시간은 간다. 시곗바늘은 계속 움직인다. 두시. 아직이다.
와인.
그는 와인(순간 코디얼 주스로 착각?)을 코와 입으로 동시에 흡입하고 목구멍이 속도를 내기를 종용하며 젠틀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실은 그 친구가 주관자야.
말해도 돼. 원체 멍청하니까.
코를 킁킁대는 친구와 음식 주문 사이의 긴장감. 블레이지즈란 이름과 겨자의 콜라보로 폭탄을 맞은 듯한 슬롯 머신 프로그램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하게 응대하는 모습이 무척 유머러스하다. 우리 모두가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감정이기에. 겉으론 태연한 척 하지만 속에선 지진이 일어나는 이런 느낌을 우리는 모두 겪어본 적이 있기에 이런 지점에서 빵 터지는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그걸 찾고 있어. 그래 그거. 주머니 다 뒤져봐. 손수건. 조간지 프리먼. 어디다 넣었지? 아 맞다. 바지에. 지갑. 포테이토(부적). 대체 어디다..
서둘러. 침착하게 걸어. 쫌만 더. 심장아.
어딘가에 넣은 걸 찾던 그의 손이 바지 뒷 주머니에서 뜨듯해진 종이에 들러붙은 (로션이 된) 비누를 찾았다. 아, 슬롯 머신 프로그램 거기에! 그렇지. 정문이다.
살았다!
먼발치서 빚쟁이를 봤다거나 자신을 못 잊고 질척이는 옛 연인을 목격했을 때의 반응이 이쯤 될까. 아내 몰리가 오늘 함께 바람피울 작자를 길에서 보고는 화들짝 놀라 심장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친다. 잘생긴 박물관 건물에 시선이 사로잡힌 척, 크림색 돌 곡선 그리스 건축을 찬미하는 척, 주머니를 죄다 들쑤시며 다급하게 뭔가를 찾는 척, 쫓기듯 홀로 스릴에 방망이질하는 심장을 붙들고 안전한 은신처가 될 박물관의 정문으로! 그의 충격, 불확신, 확신, 심적 동요가 생생하게 압축되어 문장이 심장처럼 뛰는 것 같다.
슬롯 머신 프로그램을 닮은 그 친구가 다시 생각났다. 향이 무난하고 저렴해선지 다섯 개들이 한 팩으로 그가 사 나르던 비누가 있었다. 끈으로 동여맨 몇첩 한약재처럼 비누를 묶음으로 사서 쓰는 게 신선했다. 슬롯 머신 프로그램에게 부적 같은 레몬 비누가 있다면 그 친구에겐 향수 대용이기도 했던 팜올리브 비누가 있었다. 슬롯 머신 프로그램이 더블린의 때를 비누로 씻어낸 것처럼 하루에 쓰고 남은 감정까지 손톱에 낀 때처럼 말끔하게 지워냈을 것이다. 대량생산 수퍼용 세상 흔한 비누가 소모품 이상의 의미가 되어 어떤 순수함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되었다. 잔여 거품은 몸에 남기는 여유로움으로, 비누냄새 폴폴 풍겼던 어느 소설의 남자 주인공을 연상케 하며. 조각 비누는 생김새나 용도에서 슬롯 머신 프로그램 시대의 비누에서 거의 진화하지 않았다. 단지 그 시대엔 중산층에 보급되기 시작한 럭셔리한 이미지가 있었고 소독성과 위생성이라는 개념이 일상에 자리 잡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주머니를 뒤져 찾은 레몬향 비누는 보일란과 대면할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 외에도 그 자체로 슬롯 머신 프로그램에게 안도감을 선사하기에 앞으로도 이 둘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