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파라오 슬롯 한 잔

하파라오 슬롯처럼 살 순 없어도 에세이는 쓸 수 있지

“어쩌면 에세이는 작가의 커다란 TMI가 아닐까 싶어요.”

오랜만에 만난 아영에게 말했다. 에세이는 이제 못 쓸 것 같다고. 우리 앞에 준비된 맥주 캔은 따지도 않았지만 나는 벌써 취한 사람처럼 속내를 덤덤하게 털어놨다. 그러자 아영은 냉큼 책 한 권을 건넸다.언니, 이 책 한번 읽어봐요. 강한 사연, TMI가 없어도 글 쓸 수 있다니까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하다면 하파라오 슬롯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여행을 하며 쓴 책이었다. 굴곡 있는 사연이 없어도 근사하게 글을 쓸 수 있다고, 재밌을 수 있다고. 아영은 자신이 얼마나 감탄하며 책을 읽었는지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는 하파라오 슬롯의 팔자에 대해서 논했다. 봄이면 러닝 하기 좋은 도시를 찾아, 공항으로 향하는 하파라오 슬롯의 체력을. 세계 곳곳을 쏘다니며 글 쓰는 작가의 풍요를.


바로 다음 날 위스키를 마시게 된 건 우연이었다. 낮에는 책을, 밤에는 술을 파는 마산 ‘화이트 래빗’에서 달님을 만나기로 했고. 하필이면 가게 입간판에 ‘위스키’가 적혀 있었다. 커다란 백팩에는 하파라오 슬롯가 쓴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 들어있었으니, 거침없이 주문했다. 낮 2시 10분에 먹기에는 딱 봐도 무리인 위스키를.


파라오 슬롯


사장님은파라오 슬롯입문자가마시기좋을거라면모어15산을건넸다. 이걸마시면하파라오 슬롯처럼있을까. 모금삼키자속이타들어것처럼뜨거웠다. 함께건네주신해바라기씨앗으로속을달래며책을펼쳤다. --. 발음만해도고급스러운단어가곳곳에박혀있는하파라오 슬롯의책을넘겼다. 지성이흐르는문장사이로파라오 슬롯향이실제로났다. 이걸어떻게잔이고마실수가있지.


유려한 문장들을 눈으로 훑다가 멈춰서 노트북을 꺼냈다. 하파라오 슬롯처럼 살 순 없어도, 내 이야기를 쓸 수 있잖아. 아무리 하파라오 슬롯라도 대한민국 경남 창원에서 아이 셋 키우며 동네 공원을 배회하는 여자 이야기를 나보다 잘 쓰진 못하겠지. 글 쓸 결심이 선 나는 앞에 앉은 달님에게 제목을 넌지시 말했다.


“제목 이거 어때? 하! 파라오 슬롯파라오 슬롯~”


하파라오 슬롯와레드벨벳<파라오 슬롯오마주라고하기에는많이조악한제목. 달님은대답대신가만히손으로엑스자를만들었다. 싱거운농담을안주삼아나는마지막남은파라오 슬롯를쭈욱털어마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