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병의 순위를 꼽는다면 암과 슬롯 머신 규칙이다. 암은 워낙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고, 슬롯 머신 규칙은 이름이 가진 이미지가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강력범죄에는 슬롯 머신 규칙이라는 병명이 종종 등장했다. 그래서 나 역시 무지하게도 슬롯 머신 규칙을 그저 망상에 취해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 수 없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질환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통해 그 편견은 깔끔하게 제거됐지만 말이다.
슬롯 머신 규칙은 청소년기부터 성인기에 걸쳐 발생하는 편이고 깊은 스트레스, 취약한 유전자와 뇌를 원인으로 추정한다. 그건 다른 정신질환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워낙 환자가 많다 보니 우울증에는 ‘마음의 감기’라는 너무나 가벼운 별명까지 있다. 2022년 기준 국내 우울증 환자 수는 100만이 넘었다. 따지고 보면 슬롯 머신 규칙과 우울증은 원인이 닮은 꼴인데도 슬롯 머신 규칙은 화들짝 놀랄 만한 공포의 질환이고, 우울증은 가볍게 앓고 지나갈 감기처럼 대한다. 만약 슬롯 머신 규칙 환자의 비중과 우울증 환자의 비중이 바뀐다면, 슬롯 머신 규칙 환자의 수가 100만이 넘는다면 그때도 공포의 질병으로 느껴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슬롯 머신 규칙에 대한 편견을 두드리고 병의 실체에 대해 알려준다. 그리고 환자 가족들의 입장과 시선이 너무나 잘 드러난다. 아마 가족들에겐 삼촌은 애틋한 가족이면서도 짐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그런 가족관계는 장애를 떠나서 곳곳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어떤 사회구성원이 홀로 자립이 안 될 경우 그를 보조할 수 있는 사회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게 너무나 멀고 어렵고 방대한 일이라서 큰 짐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가족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슬롯 머신 규칙 걸린 삼촌을 둘러싼 가족들의 복잡한 감정을 보면서 안타깝거나 힘들겠다는 생각보다는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가족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떠올리며 가족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골몰하기도 했다.
그리고 저자가 슬롯 머신 규칙에 걸린 삼촌을 ‘미쳤다’ ‘미친놈’과 같은 단순한 한 마디로 ‘납작하게’ 표현한다고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타인의 정체성을 그토록 ‘납작하게’ 말한 적이 나 역시 있지 않을까. 사실 ‘미치다’는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된다는 뜻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미친놈과 미쳤다는 욕설에 가깝기 때문에 정신질환자에게 쓰기 적절한 말은 아니다. 남들은 다리에, 위에, 근육에, 척추에 몸 곳곳에 질환이 있어 환자로 불리지만 뇌에 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욕설로 불려야 하는 삶. 타인에 의해 납작해져 버리는 삶을 생각하며 슬롯 머신 규칙이라는 질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