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공간도 시간과 함께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아는가. 거기 있던 사람을 따라, 물건과 가구를 따라, 이야기들을 따라 사라져 버리는 공간들이 우리 카지노. 고등학교 3학년 때 각별하던 친구와 부산 여행을 갔었다. 다소 과격한 기사가 운전하는 버스를 타고 벽화 마을에 갔다가, 광안리에 갔다가, 오후쯤 되어서 영도로 들어갔던 것 같다. 부산은 처음이 아니었으나 영도는 처음이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여행하는 곳의 서점에 들러서 거기서 파는 시집을 한 권씩 사모으는 취미가 있다. 여행지에 어울리는 시집을 사놓으면, 다시 읽어볼 때마다 그 공간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영도에 가보기로 했을 때부터 손목우리 카지노를 염두에 둔 것도 그래서였다. 남항대교를 건너서 우리는 영도로 들어갔다. 우리 카지노가 있는 흰여울문화마을은 주도로와 해안절벽 사이에 위태롭고 복잡하게 뻗어있는 거리다. 파란색 페인트로 칠한 난간과 덜 개발된 옛날식 대문들로 이루어져 있는 골목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와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해있다.
노상 매대 사이로 고양이들이 잠을 자는 것을 보면서 손목우리 카지노에 도착했다. 손목우리 카지노는 2층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것 같이 생겼다. 바다와 마주해 있는 테라스를 지나서 들어가면 코앞에 책으로 가득 찬 벽이 있고, 왼쪽에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서점 주인이 있다. 오른쪽 문 뒤에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숨겨진 계단이 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판매하고 있는 음료들에 대한 설명과 전시한 책의 서평을 붓펜으로 캘리그래피 해놓은 카드들이 곳곳에 꽂혀있다.
우리는 뱅쇼와 샌드위치를 주문한 다음 읽을 책을 골라 테라스에 앉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바로 옆에서는 남항대교 위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해 질 녘 어둠 속에서 건너편 항구에 불빛이 들어오고, 텅 빈 것 같았던 바다가 어선의 조명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할 때 모든 것들이 살아났다. 친구가 가져온 즉석 사진기로 서로를 찍은 다음 한참 인생에 대해 지껄이다가, 나는 뱅쇼를 홀짝거리며 우리 카지노에서 산 육호수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그의 시 <나는 오늘 혼자 바다에 갈 수 있어요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바다에 갔지요. 그것만은 어쩔 수 없어요. 가끔, 이곳으로부터 멀어져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곳에 올 때면, 이곳으로 버려져 다행이라 여기지요.”
그날의 잔잔한 바닷소리와 하늘의 빛깔을 어떻게 표현할까.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는 동시에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을 그 바다는 어떻게 주었던 걸까. 나는 그곳의 노을과 바닷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을 데리고 종종 손목우리 카지노를 찾았다. 내가 마셨던 뱅쇼를 글뤼바인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노을이 질 때마다 서점 문 앞에 드러누워있는 고양이와 인사도 하게 되었다. 시와는 다르게 그곳은 혼자 가는 곳일 수 없었다. 그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게는 영도와 손목우리 카지노, 부산과 노을이 동의어였고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그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그 후에도 다른 몇 친구들을 데리고 갔다.
6주쯤 전에 손목우리 카지노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간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손목우리 카지노가 있던 주택은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글뤼바인 향과 즉석 사진기와 영도 앞바다의 노을은 이제 공존할 수가 없다. 공간은 단순히 무언가가 들어설 수 있는 빈 곳이 아니라, 그곳과 관계하고 있던 모든 것들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시집을 사두어 다행이다. 혼자 그곳에 가고 싶을 때마다 이제 나체의 남녀가 껴안고 있는, 존재하지 않는 우리 카지노의 책갈피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