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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슬롯 머신고 왜 말을 못 해?

두 달에 한 번 정도 머리 염색을 한다. 슬롯 머신로 염색을 한 지 족히15년이넘었다. 화학염색약은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전문 슬롯 머신샵에 갔다가 집에서도 했다가 다시 동네 염색방에 간다. 머리가 단발 이상으로 길거나 무더운 한여름엔 샵을 이용한다. 감당 가능한 짧은 머리일 땐 집에서 셀프로 한다.


몇 년 동안 드나들었던 동네 염색방. 슬롯 머신 전문샵은 아니지만 슬롯 머신를 취급한다. 길이 콱 막히는 강남의 샵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던 것에 비하면 정말 편리하다. 두루두루고마워서 단골이 되었다. 사장님 손이 또 어찌나 야무진지. 슬롯 머신를 꼼꼼하게 바르고 머리를 세상 시원하게 감겨주신다. 처음엔 칭찬을 잔뜩 해드렸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바로 샴푸 타임. 정수리를 문지를 때마다 시원함을 넘어서 나는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뭐랄까, 그 순간이 짧아서 슬롯 머신는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면 곧 지나간다. 그동안 좋아하다가 '이젠 아파요'라고 하기엔 나도 민망하고 그녀도 뻘쭘할 터. 사장님은 세월을 거꾸로 먹는 게 틀림없다. 해가 갈수록 힘이 세어지는 것 같았고 나는 점점통증이 강해지는 중.


지난번에도 '오늘은 슬롯 머신고 말해야지' 마음먹었다. 에고,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십 하고도 절반을 살아온 아줌마가말 한마디가 무에 그리 어려울까. 이상하다. 꼭 해야 할 말은 똑 부러지게 하는 편인데. 내가 그렇게 할 말을 못 하는 사람은 아닌데. 아닌 게 아닌... 가벼??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았던 암흑기는 한참 전에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며느리 역할에 충실했던 15년 동안이었다. 이후 여행에 눈을 뜨고 날라리 주부가 되었다. 그러기를 또 14년. 이만하면 독이빠질 때가 되었건만. 아직도 내 안에는 쉬운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갈고리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틀 전에 셀프로 슬롯 머신 염색을 했다.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해서 염색방에 못 간 것은 절대 아니고요. 머리를 잘랐더니 길이가 짧아졌다. 집에서 할 만한 수준이었다는 야그다.


또 하나, 염색방의 슬롯 머신 제품이달라졌다. 슬롯 머신는 원래 녹색 가루인데 물에 개면 진흙색이 된다. 그런데 사장님이 개어놓은 슬롯 머신의 색깔은 빨간색. 뭔가 화학약품이 섞이지 않고서야 저런 색이 나올 리 없었다. 그녀는 그것도 천연 슬롯 머신라고 강변했으나 믿음이 가진 않았다. 제가 슬롯 머신에 관해선 사장님보다 경력이 길답니다.


결국 정수리가 슬롯 머신는 말을 하지 못한 채발길끊은셈인가? 머리가 자라면 다시 전문 슬롯 머신샵을 찾아가야 할 것 같다. 거기에선 아프면 아프다고 꼭 말을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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