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는 피는데, 아네모넨 지는데”
이미자 노래 '슬롯'와 바람꽃
슬롯는 피는데, 아네모넨 지는데
아련히 떠오르는 그 모습 잊을 길 없네
해가 떠도 달이 떠도 가슴 깊이 새겨진
허무한 그 사랑을 전할 길은 없는가.
이슬에 젖은 꽃송이 슬롯넨 지는가
03
마음 바쳐 그 사람을 사모하고 있지만
허무한 그 사랑을 달랠 길은 없는가.
트로트의 여왕 이미자가 1968년에 부른 노래 “슬롯”(https://www.youtube.com/watch?v=XLIHM-uzMWo)를 듣고 나서, 이 노래의 슬롯가 어떤 꽃일까 궁금해졌다. 슬롯는 미나리아재비과의 Anemone속의 식물을 가리킬 터인데, 이 속을 우리나라에서는 바람꽃속이라고 하며 꽤 여러 종 자생한다. 나는 바람꽃속 꽃으로 지금껏 겨우 꿩의바람꽃(Anemone raddeana)과 홀아비슬롯(Anemone koraiensis), 슬롯(Anemone narcissiflora L.) 등 3종 정도만 볼 수 있었다. 이 중 고산지대에서 자라기 때문에 만나기 힘들다는 슬롯은 2023년에야 겨우 설악산에서 감상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공룡능선을 걷기 위해 작년 9월 2일부터 3일까지 1박 2일로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을 때였다. 대청봉의 슬롯은 이미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지만 공룡능선의 슬롯은 뒤늦게 핀 꽃을 몇 송이 달고 있었다. 공룡능선을 걷는 것은 극기훈련처럼 힘든 발걸음이었지만 기쁜 마음에 잠시 멈추어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면서 감상했다.
나는 연전에 “추사 선생이 노래한 추모란, 당국唐菊이 과꽃일까?” (/@783b51b7172c4fe/77)를 쓰면서, 추모란은 우리가 ‘대상화待霜花’, 혹은 ‘추명국秋明菊’으로 부르는 Anemone hupehensis var. japonica일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때 대상화의 속명이 Anemone라서 대상화도 슬롯의 일종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자가 노래한 ‘슬롯’는 어떤 종류의 슬롯를 가리키는 지는 몰랐던 것이다.
02
2001년 출간된 <한국의 화훼원예도감을 보면 슬롯가 학명 Anemone coronaria L., 영명 Poppy anemone, 원산지 지중해 연안으로 4~5월에 꽃이 피는 다년생 구근 화초로 소개하고 있다. 원예식물로 바람꽃속 식물로는 이 한 종만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자가 노래한 슬롯가 바로 Anemone coronaria일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근대의 대표적인 원예가인 최영전崔榮典(1923~?)이 1963년 발간한 <백화보百花譜에 슬롯(Anemone coronaria)가 봄 꽃으로 수록되어 있다. “슬롯는 그리스어의 anemos 즉 바람이라는 뜻에서 온 것으로, 바람이 잘 스치는 곳을 좋아하며 꽃핀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꽃말은 “속절없는 사랑, 배신의 사랑”이다. 어떻게 보면 기나긴 세월 앞에서는 그 어떠한 사랑도 속절없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가 내린 주말 저녁에 Anemone coronaria 꽃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나서 다시 이미자 노래를 듣는다. 노래 소리가 꽃의 이미지와 함께 더 애절하게 들린다. 애이불비哀而不悲랄까, 봄이 오면 꽃시장에 나가봐야겠다.<끝
+표지사진 - 꿩의슬롯, 2017.4.1 남양주